1956년 5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내세웠다. 여러모로 이 대선이 우리 정치사에 중요한 의미를 남겼지만 그중에 하나가 민주당이 내건 구호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당시 이 구호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하에서 먹고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의 심금을 절절하게 울리는 슬로건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컨설턴트 런츠의 말을 빌리자면, 이 구호는 우리 선거사 최고의 ‘먹히는 말’(words that work)이라 할 수 있다. 2015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행그리(hangry)란 단어가 등록됐다. 행그리는 배고픈(hungry)과 화난(angry)이 합쳐져 ‘배가 고파 화가 난 상태’를 뜻하는 신조어다. 먹고살기 힘들고, 강..
안철수 전 대표의 탈당을 계기로 우리 정치를 좀 찬찬히 돌아보면 좋겠다. 지금 야권의 유력한 대선주자라고 하는 문재인 대표, 박원순 시장, 안 전 대표 등은 모두 ‘불려 나온’ 사람들이다. 정치에 뜻을 품고, 정당에서 훈련받고, 선거를 통해 검증받으면서 대선주자의 반열에 오른 분들이 아니다. 시대가 그들을 호명하고 그들이 부응해 나왔지만 다른 한편 진보정당의 약화가 초래한 현상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정치는 매우 후지고 지질한데, 그 원인으로 진보정치의 무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진보정치의 무능은 진보정당의 약화에서 비롯됐다. 흔히 지적하듯, 진보는 정치보다 운동에 더 익숙하다. 그런데 보통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 나라들을 보면 예외 없이 정치가 동력이다. 결국 진보가 유능한 정치를 통해 세..
1979년 5월30일,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의 전당대회가 있었다. 지금은 잊힌 이름이지만 당시에는 총재로 불리던 당의 리더를 뽑는 자리였다.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김영삼(YS)이 이철승을 물리치고 선출됐다. YS의 승리에는 김대중(DJ)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양김 간의 경쟁을 고려할 때 그들의 연대는 의외의 일이었다. 그 담대함이 결국 그해 10월 유신체제의 붕괴를 이끌어낸 셈이다. 1970년 9월에 있었던 당의 대선후보 선출에서 격돌한 이후 YS와 DJ는 필생의 라이벌이자 파트너로 한국 정치를 주도했다. 그들이 손을 잡고, 힘을 합칠 때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깊은 균열을 낸 1984년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결성도 양김이 협력해서 만들었고, 이 민추협이 주축이 돼..
다시 개헌론이 불거지고 있다. 한동안 금기어이던 개헌이 다시 정치 아젠다로 등장하는 것부터가 변화다. 작년 10월 김무성 대표는 2015년 초 개헌 논의의 봇물이 터질 것이라고 했다가 청와대의 반발에 직면해 자신의 불찰이라며 사죄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즈음 국무회의를 통해 쐐기를 박았다. “개헌 논의 등 다른 곳으로 국가역량을 분산시킬 경우 또 다른 경제 블랙홀을 유발시킬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친박 실세들이 개헌론을 꺼내는 것은 그 자체로 생뚱맞고 낯부끄러운 표변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이슈에 대한 여론의 광범위한 반발을 덮기 위해 민생 프레임을 가동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터에 이 무슨 눈치 없는 헛발질인가. 모양이 우습기는 하지만 속셈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떤 의도일까? 정치에선 흔히..
다가올 계절도 불쑥 등장하지 않고 미리 전갈을 보낸다. 흔히 봄의 전령은 개나리이고, 가을의 그것은 코스모스라고 한다. 문득 계절의 전령을 떠올린 것은 지난 10월28일에 있었던 재·보궐선거 결과 때문이다. 국회의원 선거도 없었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탓에 언론의 관심을 얻지 못했고, 투표율(20.1%)도 너무 낮았다. 이 때문에 지나친 해석은 금물이나 나쁜 조짐의 기운이 드는 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10·28 재·보선이 내년 총선 결과를 알리는 전령이 아닐까?’ 전국 24개 지역에서 치러진 이번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은 기초단체장(경남 고성) 1곳, 광역의원 7곳, 기초의원 7곳 등 총 15곳에서 승리한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은 광역의원 2곳에서 이기는 데 그쳤다. 광역의원 선거가..
대한민국 보수의 자랑은 역시 산업화다. 좀 길게 잡으면 무능한 선조 이후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가난 구제, 그걸 해낸 세력이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세력이다.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과 경제발전을 직접 체험한, 6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갖는 ‘세대효과’는 클 수밖에 없다. 이 산업화가 사회적 바탕이라면 보수의 정치적 기둥은 반공·반북이다. 이 반공·반북 또한 한국전쟁을 통해 강한 세대효과를 낳고 있다. 산업화를 일궈냄으로써 얻은 정당성은 IMF 경제위기로 무너졌다. 반면에 반공·반북 이념은 햇볕정책으로 흔들리긴 했지만 굳건하게 보수 정체성의 벼리로 남아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 보수의 헤게모니는 안보보수가 잡고 있다. 그럼에도 워낙 낡은 보수라 이 틀을 깨는 혁신의 시도는 불가피한 과제였다. 보통사..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드는 의문이다. 아무리 ‘제왕적’이란 수식어가 붙는 대통령 권력이지만 최소한의 염치나 두려움도 없는 듯하다. 과거 왕들도 신하들이 통촉 운운하며 반대하면 대개 뜻을 접는다. 고집 피우고 마음대로 하다가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런데 21세기 민주사회의 대통령이 무서운 얼굴로 여당의 원내대표를 찍어내더니 이제는 당 대표까지 깔아뭉개고 있다. 기세로 보면 김무성 대표가 백기 투항해야 끝날 듯하다. 박 대통령이 저렇게 하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계산을 거론한다. 각론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총선 후 국정 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한다.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비록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국민참여경선으로 하자..
통합은 합치는 것이고, 혁신은 바꾸는 것이다. 통합의 반대말은 분열이고, 혁신의 반대말은 수구다. 한국 정치사에서 야당이 주로 선택한 것은 통합이었다. 야권연대든 후보단일화든 그것은 모두 통합을 일컫는 말이다. 소선거구-단순다수제의 효과로 인해 선거가 주로 두 당의 게임이 되다 보니 분열한 쪽이 불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야권은 끊임없이 통합을 모색하는 것으로 위기나 수세를 돌파하곤 했다. 어느 세력이든 분열보다 통합을 선호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 통합이 혁신을 방기하는 알리바이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이 그렇다. 통합을 핑계로 낡은 정당이 됐다. 이 때문에 통합의 효과도 이젠 거의 없다. 지난 총선에서 야권은 통합해 선거를 치렀으나 졌다. 새누리당이 40%대의 안정적 지지율을 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