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구별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들 중 한 곳에 살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지구별에서 가장 환한 희망을 만드는 국민이 되고 있는 중이다. 가장 불행한 나라에서 가장 환한 희망을 만드는 국민은 지금 ‘인류의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권했던’ 무지의 길을 가고 있다. 무지의 길은 ‘파괴적인 힘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게 하려고 그 힘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힘을 키우겠다는 발상’을 버리는 용기의 길이다. 헌법과 국정과 공직을 사유화해서 나라의 살림과 국민의 안녕을 파괴한 권력 엘리트 집단에 대해 국민은 오직 평화의 힘으로 질서 있게 응징하려고 어떤 괴물을 만날지 모르는 무지의 길을 밝히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고 있다. 이 무지의 길에 들어선 국민은 지난 6일 국회 청문회 증인석에 앉아 모르쇠로 일관하는 재벌..
촛불 민심과 국민 여론은 거듭 대통령의 하야다. 하지만 대통령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헌법을 무기로 대통령이 국민을 이기겠다고 작정했다는 뜻이다. 선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마지막 가능성으로 남았던 대통령의 정치는 완료됐으며 명예혁명과 망명을 운운했던 일각의 로망은 소멸했다. 남은 것은 국회의 정치와 시민의 정치다. 국회의 정치는 이제 외길로 보인다. 탄핵을 가결하고 헌법재판소로 가는 길, 대통령의 헌법과 국회의 헌법이 맞붙는 막다른 길이다. 반면 시민의 정치는 이 길과 함께 또 다른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사문화된 원칙을 되살려 엘리트 독과점 정치의 대의 민주제를 넘어서겠다는 국민혁명의 길이다. 날마다 특종과 속보와 가십성 뉴스가 홍수를 이루지..
아이가 잠든 밤 영화에 빠진 내게 아내는 불쑥 노트북을 내밀었다. 뭐야, 했는데 아내의 눈시울이 뜨거웠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 동영상에선 “해방이화, 총장퇴진”의 앳된 함성이 울려퍼졌다. 학생은 죄 얼굴을 가렸는데 옷차림은 발랄했고 합창곡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다. 다른 동영상에선 녹색 머플러를 두른 교수와 복면을 쓴 학생이 이산가족처럼 포옹하고 있었다. 그들 중 보라색 염색을 하고 눈가를 닦는 교수를 가리키며 아내는 울먹였다. “저분이 내 은사야.” 86일간의 이대 본관 점거농성은 그렇게 꼬리로 몸통을 흔들었다. “최순실 딸 부정입학 및 학사특혜 규탄”은 최순실 게이트의 뇌관으로 전 국민의 공분을 깨웠다. 아울러 이대 학생 시위는 ‘느린 민주주의’라는 쟁점을 남겼다. 이 작명은 시위대가 학교..
재난은 이제 우리의 생활이 되고 있다. ‘안전지대 한반도’라는 통념은 이미 깨졌다. 올여름부터 집중적이고도 연쇄적으로 겪는 폭염, 지진, 태풍, 원자력, 북핵의 문제는 더 이상 평소와 달랐던 천재나 인재의 경고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이라 불렀던 생활세계의 토대가 수시로 일거에 아수라장이 될 수 있다는 현실감이다. 올해의 남은 날들과 내년은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재난의 생활화’라는 오늘보다 더 확실한 내일이다. 세월호, 메르스, 가습기 살균제와 함께 하늘과 바다와 땅의 재난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블랙홀 같은 트라우마로 내면화되고 있다. 더불어 드러난 문제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와 정치만이 아니다. 만약 한반도 전역으로 재난이 파급된다면, 그날을 대비해 무엇을 준비해왔고 어떻게 행동하며 폐허에서..
거짓말 같았다. 끝날 줄 모르던 폭염에 감기를 견디며 빌빌대는데 문득 가을이 와 있었고, 회복됐다. 하나 추석 당일 재차 감기에 걸려 일주일을 흐느적댔다. 핑계를 구한 몽롱한 몸은 연휴 내내 TV와 지냈다. 무료 영화를 찾아 160개가 넘는 채널을 돌리는 족족 과 과 와 같은 먹방 프로그램이 무한 재방송 중이었다. 두 눈은 보면서 맛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식욕은 몸살로 무감각한, ‘심신분열의 거짓말’ 같은 상태였다. 이렇게 두세 시간을 멍해지다가 뉴스로 눈길을 돌리면 거짓말처럼 수십 년간 똑같은 추석 풍경이 화면에 있었다. 텅 빈 서울, 꽉 막힌 고속도로, 늙은 부모와 시골, 선물 꾸러미와 어린 자식을 양손에 끼고 환하게 웃는 가족이 거기 있었다. 거짓말 같았다. 한반도의 올해 여름은 1973년 관측 이래..
예술이란 무엇인가? 대가의 어록과 학계의 연구와 속세의 ‘썰’을 모아보면 대답은 태산보다 거대할 것이다. 난해하거나 자명하고 진중하거나 농담 같고 상투적이거나 발칙한 예술론의 백가쟁명에도 불구하고 바탕엔 ‘예술은 신성하고 고귀하다’는 18세기 부르주아 미학의 고정관념이 깔려 있다. 반면 소설가 한창훈에겐 이런 질문 자체가 ‘지랄’ 맞게 커서 문제다. 너무 커서 삶의 한계를 초월하는 질문은 감각과 정신을 헐벗게 만들기 쉬워서다. 하여 “문학 바깥에 있는 비문학이 더 중요하다”고 잘라 말하는 작가에겐 밥과 일과 놀이의 비예술 생활세계에서 빚어지는 희로애락을 경청하고 참여하며 기록하는 실천이 예술이다. 7월에 나온 그의 연작소설 (한겨레출판사)는 “어느 누구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는 한 줄의 법조문..
10년 경력의 34세 연극배우인 그는 프리랜서였다가 2년 전 거리예술을 하는 극단에 들어갔고 1년 전 연극교실의 강사를 맡았다. 이 연극교실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참여 주민의 이야기를 가지고 창작극을 만든다, 주민이 연기를 익히는 것은 동네에서 자기 역할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 강사는 연극 교육이나 연습 시간보다 더 많은 일상을 참여 주민과 같이 보낸다, 강사배우와 주민배우는 서로를 이해해야 하는 동일한 과제를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의 경계와 연결이 명확해야 한다, 취미 활동과 자신을 변화시키는 실천은 다른 것이다 등등. 과연 이 연극교실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강사인 그는, 두 살 연상의 주민배우와 지난 7월7일 결혼식을 올렸다. 주민배우를 모집한다는 현수막을 ..
2017년은 제19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해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8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70년이 되는 해이다. 이 70년의 세월 중 6·25 한국전쟁의 시기를 빼면 앞쪽 30여년은 군사독재의 국민총동원 산업화 체제였다. 이 체제는 ‘민주화’와 더불어 ‘세계화’라는 큰 파도에 휩쓸려 변화됐다. 시공간의 제약이 풀리자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만능의 욕망이 분출됐다. 이 뒤쪽 30여년을 ‘성취의 청년기’와 ‘축적의 중년기’로 보낸 세대는 지금 우리 사회의 장년과 노년이 됐다. 반면 이들 슬하에서 자란 당대의 청년과 중년은 풍요 속의 상실과 혐오를 되씹으며 나이를 먹는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의 ‘위대한 유산’을 잘 정리하지 못하면, 향후 30여년은 무기력과 자괴감의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