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옥란·김순석·최정환·이덕인…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장애열사 때로 찌들고 피로 물든 유언들이 한국 장애사의 바탕 무늬가 돼 장애 조직들을 이만큼 키워냈다 말한 사람이 떠난 세상에 남아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드는 저 말의 정체는 무엇인가. 새로 나온 책들을 일별하다가 어느 책의 표지에 박힌 말을 보고는 아는 사람을 확인하듯 눈이 커졌다. “나의 주위에 계신은 동료 여러분에게 부탁이 있읍니다. 네 이루어지지 안는 것들을 꼭 이어주십시요. 나의 시신은 화장해서 두망강에 뿌려주세요. 준호야 사랑한다. 꼭 너하고 사려고 해는데, 준호야 준호야 네가 보고 싶군나.” 익숙한 글씨, 맞춤법을 어긴 채 포복하듯 비뚤배뚤 나아가는 글자들. 어떻게 당신을 몰라볼 수 있겠는가. (오월의 봄). 이 책에는 말하는 사람이 때로는..
모든 일이 너무도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났다. 1995년 12월21일에 5·18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996년 1월23일 검찰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내란죄 및 내란목적살인죄 혐의로 기소했다. 1심 법원은 전두환을 내란 및 반란의 수괴로 판시하여 사형 판결을 내렸는데, 2심에선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97년 4월17일 대법원에서 형이 최종 확정됐다. 그해 12월18일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고, 그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특별사면을 건의했으며, 전두환과 노태우는 12월22일 석방됐다. 심판이 끝나는 동시에 용서가 시작된 것이다. 21세기에 태어난 세대는 전두환의 범죄를 배우면서 그의 당당한 노년을 목격하느라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김대중 당선자의 결단이었고, 그의 오랜 도덕적·종교적 신념의 이행이었..

‘자존감’은 유행어가 되었다. 그 시작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에 설립된 ‘자존감과 개인적·사회적 책임의 증진을 위한 캘리포니아 특별위원회’는 1990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자존감’(self-esteem)을 각종 범죄와 폭력과 중독 등의 예방을 위한 “사회적 백신”으로 제시했다. 인간은 이런저런 요소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가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모두가 내면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너새니얼 브랜든의 자존감 이론 작업이 이 보고서로 탄력을 받았고, 보고서의 메시지는 를 통해 대중에게 보급되면서 날개를 달았다. 이후 자존감은 미국 전역의 학교 및 단체의 교육 목표 중 하나로 정립된다. 너새니얼 브랜든에 따르면 자존감의 두 핵심 요소는 ‘..

1. [특권] 아버지 곽상도의 소개로 화천대유에 입사해 6년을 일하고 50억원의 퇴직금을 받은 아들 곽병채씨는 이렇게 항변했다. “저는 너무나 치밀하게 설계된 속 말일 뿐입니다.” 많이들 지적했다시피 이 비유는 틀렸다. 극중 인물들의 벼랑 끝 절망이 그에게 있었을지 의문이고, 부친이 화천대유로부터 후원금을 받았으니 아들인 그는 오히려 설계자 쪽에 속한다. 작품에서 그와 비슷한 캐릭터를 굳이 찾는다면 설계자라는 신분을 감추고 게임에 참여한 오일남(오영수)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안전을 보장받은 상태에서 게임을 즐기다가 적절한 시기에 자진 탈락해 그 지옥에서 빠져나온 인물이니까. 의 성기훈(이정재)에게도 특권이 있을까? 제 가족들에게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그가 그럼에도 사실은 선한 인간이라고 이해받는다는..

지난 24일은 ‘세계 기후행동의날’이었다.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독일 베를린에서 수천명의 기후활동가와 함께 기후파업 집회에 나섰다. 독일 총선을 앞두고 기후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을 향해 일침을 가하는 압박 행동이다.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홍수와 산사태를 지난여름 목격하고도 독일 정치권이 정신 차리지 못하자 거리로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청소년기후행동이 곳곳에서 집회를 열고 1인 시위도 벌이고, 정부 주도의 기후위기 대응판을 전복하기 위한 ‘기후시민의회’ 구성도 제안했다. 정부와 정치권이 더 적극적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안타깝게도 널리 퍼지지는 못한 것 같다. 과감한 탄소 감축, 미흡한 탄소중립기본법 당장 폐기 등의 주장은 정치권의 ‘대장..

존중과 선망과 존경은 비슷해 보이지만 억지로 구별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존중’은 상대를 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동의하지 않을 때조차도 인정할 만하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선망’은 부러워서 닮고 싶다는 마음이다. 동의는 당연한 전제이고, 노력하면 비슷해질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도 없지 않은 상태다. 이와 구별되는 ‘존경’이란 무엇인가. 동의하지 않을 때라고는 없거니와 감히 닮기를 바라기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구별이 그럴듯하다면, 우리는 존중하는 사람 중 일부를 선망하고, 선망하는 사람 중 극히 일부를 존경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존경이라는 말은 인플레이션이 심하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서로 ‘존경하는 의원님’ 운운할 때가 그렇다. 존중이면 족할 곳에, 선망의 감정도 없이, 대뜸 존경이라니. 세 ..
고위 공직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릴 예정이다. 국가인권위원장, 금융위원장, 대법관이 검증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집권 후반기이고 이미 대선 정국이라 관심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몇몇 검증 이슈가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인사청문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검증기준은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세금 탈루 등이다. 연구업적이 있는 경우에는 표절 논란도 빠지지 않는다. 인사 검증이 때론 정치 공방으로 변질하기도 하지만 고위 공직 후보자가 지녀야 할 자질을 따져보는 절차이니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공직 후보자가 논란이 되는 행위를 한 시점으로 되돌아가 보면, 당시에 그들은 5년이나 10년 뒤 논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사 청문의 대상이 될 거라고 누가 기대했겠는가. 예상했다면 그런 ..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1843)에서 비정한 수전노 스크루지의 회심을 돕기 위해 등장하는 유령 중 하나는 기괴한 모습의 소년과 소녀를 데리고 다닌다. 이름이 각각 무지(Ignorance)와 궁핍(Want)인 두 아이는 인간 사회의 두 난제를 상징하는데, 유령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소년(무지)의 위험이다. “무엇보다 더 이 소년을 경계하라. 소년의 이마에 적힌 파멸(Doom)이라는 글자가 내게는 보인다.” 영국에 디킨스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위고가 있었다. 20년쯤 후에 쓰인 (1862) 3권에서 빅토르 위고는 말한다. “무지라는 굴을 파괴하면 범죄라는 두더지도 파괴된다.” 무지는 개인의 불행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범죄의 원인이니 일종의 교육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두 작가의 호소였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