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나라가 시끄럽다. 물론 이번엔 사안의 심각성과 스케일이 다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 땅에서 바람 잘 날이 아예 사라져 버린 듯하다. 오늘은 어떤 뉴스가 이 나라를 흔드느냐가 문제이지, 오늘도 엄청난 소식이 있을지 없을지는 관건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소용돌이는 생활이 되고, 진짜 생활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말이야 민생이 먼저라지만 당장 눈앞의 불끄기 바쁜 것이 거의 1년에 365일이다. 인간의 삶과 생활도 이런 취급을 받는데, 그렇다면 다른 생물들은? 자연은? 이들에게도 관심의 차례는 과연 돌아올까? 국정농단 사건으로 온 나라가 난리통을 겪는 동안, 한반도로부터 아주 먼 곳에서, 오늘의 핫이슈와 아주 먼 문제로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바로 제66회 국제포경위원회(I..
우리 집은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 수가 좀 많은 데다가 다들 역마살까지 있는 편이라 여기저기서 모아온 물건이 한데 모인 까닭이다. 웬만한 건 함부로 버리지 않는 습관도 여기에 한몫하였다. 그러다 보니 생기는 약간의 공간 부족이 문제이긴 하지만, 인과응보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긴다. 아무리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라지만 사물도 나와 세월을 겪으며 소소한 역사와 이야기가 엮인 것인데 매몰차게 다루는 건 어쩐지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그래서 일 년 내내 꺼내보지도 않은 채 먼지만 쌓여가는 것들이 허다하지만, 이 ‘미련 덩어리’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오늘도 한 지붕 아래 같이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의미 없이 보관만 되고 있는 물건들과는 달리 특별한 기회를 만나 빛을 발하는 물건도 있다. 허름해진 이불이..
나에겐 제2의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야생 영장류를 연구했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열대 우림이다. 이 나라의 도시, 특히 수도는 너무 복잡하고 정신없어서 정이 가지 않지만 인적이 드문 시골로 들어서기 시작하면 마음이 활짝 펴진다. 맑은 물, 시원한 공기, 순진무구한 사람들. 단순하고 소박한 삶들이 늘어선 좁은 길을 따라 숲을 향해 나아가면, 수년 전 야생동물 그리고 고독과 씨름하며 지내던 날들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는 것만 같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는 밀림. 그곳이 나는 늘 그립다. 얼마 전 나는 다시 이곳을 찾았다. 오랜만에 조우한 현지 연구보조원과 얼싸안으며 옛이야기를 나누고, 숲속으로 들어가 긴팔원숭이 가족을 찾아 안부를 묻기도 했다.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
더위. 지금 이보다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 있을까. 열의 손아귀에 꽉 잡혀 꼼짝달싹도 못하며 연명하는 날들이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너무 더운 나머지 세상만사가 다 무가치해질 정도이다. 정치고, 경제고, 연예고, 스포츠고 다 필요 없다. 더워 죽겠는데 무슨. 밤이 되어도 전혀 쉴 틈을 주지 않는 더위에 헛되이 잠을 청해본다. 잤는지, 못 잤는지도 불분명한 몽롱한 정신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든다. 간신히 넘긴 하루. 하지만 오늘은 또 어쩐다냐. 사는 것이 참으로 힘들도다. 온도 몇 도의 차이가 이렇게 대단한 것이구나, 우리는 혀를 내두른다. 냉방된 공간을 산소통처럼 찾아다니는 나약한 육신을 내려다보면서, 아무리 고매하고 똑똑한 척을 해도 결국 하나의 생물일 뿐이구나, 우리는 탄식한다. 더위가 우리로 하여금 근..
모임이 있는 날이면 난 언제나 즐거우면서도 기분이 찜찜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모임은 원래의 취지가 소외된 채 진행되다 끝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환영회라 모여도 아무도 환영하지 않고, 환송회라 모여도 아무도 환송하지 않는 자리를 보는 것이 싫었다. 물론 건배할 때 한두 마디로 왜 모였는지에 대해 언급은 하지만, 누구는 고기 굽고, 누구는 술 마시고, 누구는 옆사람 하고만 떠드는 회식 자리에서 정작 모임의 근본적 목적은 쉬이 잊히는 것이었다. 잘 놀았으면 됐지 뭐, 혹자는 말한다. 너는 됐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이왕이면 나는 무엇을 왜 하는지에 충실하고 싶다. 소외현상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너무나 일반적이라 제대로 인식조차 되지 않고 있다. 가령 애인이나 친구끼리 카페에서 만나 각자의..
지난 며칠은 내게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었다. 한국에서 생태나 환경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고행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훨씬 개인적인 차원에서 겪은 고통의 나날들이었다. 지방에 사는 관계로 서울에 오면 부모님 댁에 묵으며 지내는데, 이곳은 우리 가족이 벌써 15년 이상 함께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오래 살다 보면 정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 그중에서도 나는 특별히 이 건물 앞뒤로 있는 좁은 띠의 녹지를 사랑했었다. 총 여섯 가구가 사는 일종의 빌라인 이 건물의 입구에는 소나무와 목련이 제법 울창했고, 뒤에는 상수리나무와 단풍나무 등이 다른 초목들과 함께 어우러져 내겐 각박한 도심 속 하나의 녹색 오아시스와 같았다. 집 주변에 식물이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누구나 그것을 같은 ..
누군가와 여행을 해보면 서로를 정말로 알게 된다고 한다. 좋았던 사이가 더 돈독해질 수도 있고, 괜찮았던 관계가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진 채 돌아올 수도 있다. 한마디로 여행을 통해 관계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왜일까? 아마 해답은 여행이 함께 지내는 상황을 만들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동안 동고동락하며 작은 것에서부터 집단적 의사결정을 하다 보면 이게 과연 될 관계인지 얼마간의 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물론 언제나 답이 명확하지는 않다. 어떤 때는 한 사람은 만족하며 싱글벙글하는 바로 그때 다른 누군가는 다시는 이 사람과 같이 떠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고 있기도 하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런 경우는 보통 한쪽에서 뭔가를 삭이고 있는 케이스이다. 불평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차마 말..
“우리 뭐 먹으러 갈까?” 거리를 돌아다니는 친구, 동료, 연인들이 가장 자주 내놓는 말이다. 뭘 즐기려 해도 막상 먹는 것 외에는 별다른 거리가 없어 결국 밥으로 화제가 모아지는 것이 보통이다. 단둘이 다니는 커플은 종목에 대한 의사결정 구조가 확실한 편이다. 하지만 여러 명이 참여하는 회식은 살펴야 할 눈이 많다. 연장자가 일방적으로 정하거나 그날 따라 유난히 ‘땡기는’ 메뉴를 주저 없이 외치는 사람도 없진 않으나, 한국 문화의 특성상 자연스럽게 ‘대세’가 형성되기를 바라며 함구하는 구성원들이 많다. 이리저리 배회하다 지치고 배고파지면 적당히 무난해 보이는 곳 앞에서 누군가가 제안한다. 그냥 여기 들어갈까? 드디어 결정에 도달한 기쁨에 모두들 아무 토 달지 않고 우르르 몰려 들어간다. 최대한 여러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