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1987·법문사판)의 저자 한스 모겐소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모자 에피소드를 예로 든다.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1813년, 오스트리아의 외상 메테르니히와 9시간 동안 만났다. 전쟁의 양상이 프랑스 대(對) 러시아·프로이센·영국·스웨덴 동맹군으로 변화하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에 반(反)프랑스 동맹에 참가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을 무시했고, 여전히 유럽의 지배자처럼 행동했던 나폴레옹은 상대방을 떠본다. 그는 일부러 모자를 떨어뜨려 메테르니히가 집어주길 바랐지만, 메테르니히는 못 본 척했다 . 모겐소는 의전이 곧 국력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며 ‘흥분했지만’, 20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두 인물 모두 유..
윤석열 정부를 상징하는 구호 중 하나는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이다. 이 말은 용감했지만, 저잣거리에 넘쳐나는 남성문화의 일부이자 30년이 넘은 신자유주의 통치 패러다임일 뿐이다. 물론 ‘구조도 구조적 문제도 없다’는 비현실이다.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도 증류수 같은 현실도 불가능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사회 구조적 문제다. 구조와 구조주의는 다르다. 구조는 사회의 물리적, 정치경제적, 심리적 관계들을 의미하고 이런 상황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은 없다.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개인은 사후에도 성립되지 않는다. 기억되기 때문이다. 반면, 문제의 원인을 개인 몸 외부에서 찾는 사고가 구조주의이다. 성별이든 계급이든 구조적이지 않은 문제는 없지만 구조에 대한 개인의 ..
표절은 맥락이 필요한 문제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먼저 발표했다면, 타인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일까? 어떤 지식도 사회의 자장 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페미니즘도 마르크스주의도 시작은 자유주의였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 언어로 연결된 문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2015년, 신경숙의 표절 논란 즈음 나는 관련 글을 썼다가 장정일로부터 비판받은 바 있다(한겨레, 2015년 9월3일자 인터넷판). 그는 “당신(나)이 쓴 글 중에서 순수한 당신만의 생각이 얼마나 되는가”를 질문하면서, “영향과 모방은 물론 패스티시·인용·비유·패러디가 혼재된 문학 자체에 대한 논의 없는 표절 논쟁”은 문제라는 것이다. 전후 사정을 살펴볼 때 ‘진짜 표절’도 없지는..
이 글의 목적은 어떤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20년 전 나는 처음 일본을 방문했다. 동아시아 지역 제노사이드 주제의 학술대회 일정이었다. 가장 크게 놀란 장면은 교토 거리 곳곳에 붙은 공산당 선전 포스터였다. 共産黨. 박정희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내게, 세 글자는 충격이었지만 곧바로 이성을 찾았다. 일본 좌파는 천황제를 의식, 대중노선을 채택하고 국가사회주의를 주도했다. 국가는 소수자 배제를 통해 자랑스럽게 대표되어야 하므로 일본 공산당이 자이니치, 오키나와 사람을 차별하는 ‘단체’로 타락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진보는 특정한 집단이 아니므로 내부도 다양하고 주류 사회의 서열이 그대로 반영되기도 한다. 주요 모순이 실재하고 자신이 사회운동의 주류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나머지 사람’(여성..
나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 중 해외 연출작 외에는 모두 보았다. (2002)과 을 가장 좋아한다. 은 보기 힘들어서 두 번 보지 못했지만 꿈에 나타났으므로 ‘여러 번 봤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은 세 번 보았다. 주·조연은 말할 것도 없고 독립영화 시리즈의 스타 정하담 배우까지 멋진 배우들의 기막힌 연기, 언어의 차이가 작품의 깊이로 전환되는 각본과 연출, 이야기 구조…. 이 영화의 매력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작품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날을 꿈꾸지만, 불가능한 일임을 안다. 정치적이지 않은 텍스트는 없다.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탕웨이)은 젠더 폭력 피해자다. 그녀가 남편을 죽였다면, 당연히 정당방위다. 남편은 지갑, 가방… 모든 물건에 자기..
최근 출간된 소설가 정찬의 열 번째 장편소설 의 배경 중 하나는 첸 카이거 감독의 다. 제목 는 의 주인공 장뤄룽(張國榮)의 의 대사에서 나왔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이 새는 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해. 날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는 때지.” 세상에는 ‘발 없는 새’도 있지만 ‘발 디딜 곳 없는 새’도 있다. 운명은 같다. 둘 다 날갯짓을 멈추는 순간 죽는다. 내가 일곱 살 때쯤 와 가 유행하던 시절, 우연히 TV에서 만화영화를 보았다. 홀로 바다 위를 나는 새. 그 장면만 반복된다. 아무리 날아도 새가 앉을 곳은 나오지 않고 결국 새는 바다에 빠져 죽는다. 얼마나 지쳤을까. 이후 그 새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나이 ..
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은 일본과 다르게 1997년 김대중 정권을 시작으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그 이후로도 분단상황을 이용한 안보 협박 정치에도 불구하고, 노무현과 문재인 대통령을 배출했다. 일본은 여전히 자민당 1당 체제이고, 극우 세력만 투표를 해서 변화의 기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최근 몇 년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의 ‘누가 더 무능하고 파렴치하고 부패했는가’ 경쟁을 보면서, 차라리 능력 있는 의원들의 1당 체제인 ‘민주주의 독재’가 낫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진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이철희, 표창원 두 초선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이철희 의원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인상적이었다. “제가 속해 있는 여당 얘기를 먼저 한다면, 저희는 야당 해봤잖아요. 저희가 제1야..
한국과 일본의 노동시장 연공서열제는 문제이지만, 나는 모든 이들이 나이와 무관하게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연령은 계급, 젠더와 함께 중요한 사회 구성 요소로, 모든 분야가 노소(老少)에 따른 ‘우선권’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의 전쟁터다. 나이는 다른 사회 구조와 다르게 ‘어려도’ ‘어중간해도’ ‘늙어도’ 맥락에 따라 차별받는다. 이처럼 연령주의는 간단한 주제는 아니지만, 논외는 있다. 사람들이 “그만큼 해(처)먹었으면 됐지”라고 지칭하는 이들,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평생을 양지에서 “국가를 위해 봉사”해온 사람들은 그만 일해도 된다.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가 대표적이다. 물론 공직자로서 그의 부적절성은 나이(1949년생)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은 이제 쉬거나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