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정치병 환자인가?’ 가까운 지인들이 가끔 정치 과몰입을 지적할 때면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SNS나 칼럼 등의 글에서 감정이 들끓는 정치적 발언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경우가 많아서일 텐데, 그럴 때마다 나는 살아가는 일이 다 정치인데 어찌 정치에 무관심할 수 있겠느냐며 대충 화살을 피하곤 한다. 속으로는 ‘이 신나고 흥분되는 일을 어찌 멈추라는 거냐’고 중얼거리지만. 그렇다. 비록 말이 전부이긴 하지만 정치에 관여하는 데서 희열과 보람(?)을 느끼는 나 같은 부류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치를 피곤하다고 말하고 짜증스러운 정치놀음으로부터 일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두 부류에는 공통점도 있는데, 양쪽 다 정치를 눈앞에서 벌어지는 시끄럽고 뜨끈뜨끈한 현실 정치의..
이달 4일 종영한 tvN 드라마 은 먼 옛날 권력암투가 도사리는 지엄한 궁궐에서, 어머니가 모진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우산처럼 자식을 지키고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임금을 사이에 두고 대비(김해숙)와 중전(김혜수)의 대립을 중심으로 극이 펼쳐진다. 이 드라마에는 다양한 모자 관계가 나온다. 임금의 어머니 대비, 세자와 왕자들의 어머니 중전과 여러 후궁들, 독살당한 태인 세자의 어머니 폐비 윤씨까지.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왕실교육에 뛰어드는 엄마들의 치맛바람 속에서, 궁궐은 이들의 사랑과 집념, 욕망으로 넘쳐난다. 그중 대비는 아들을 수단으로 자신의 야망을 추구하는 데 독보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식을 왕으로 앉히기 위해 중전의 소생인 세자를 독살한다. 아들이 왕이 되고 나서도 끊임없이 조종하고 지배하..
“아, 정말 밝다.” 자정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밤늦게 일이 있어 번화가에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저 말이 튀어나왔다. 도무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밝기였다. 밤하늘에 달이 떠 있지 않았더라면, 밤이라는 자명한 사실마저 의심했을 것이다. “심지어 낮보다 더 밝은 것 같아.” 인공조명 사이를 거닐며 친구가 말했다. 그는 빛에 민감해서 잠자리에 들 때면 암막 커튼을 친다고 했다. “내가 사는 곳은 밤에도 너무 밝거든.” 비슷한 시기, 운명처럼 (시공사, 2021)를 읽게 되었다. 저자인 아네테 크롭베네슈는 빛 공해의 원인에서 출발해 그것이 인간과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책을 다 읽고 ‘밤에도 밝으면 좋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달았다. 무수한 인공조명 때..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북 구미에서 김천으로 가다 보면 굽은 길을 정면으로 품고 있는 작은 산 하나를 만난다. 아빠는 정확한 위치도 이름도 모르는 그 평범한 야산을 지날 때마다 ‘저 산의 능선이 꼭 박정희 대통령이 누워 계신 모습 같다’고 하며 산등성이를 손가락으로 이어 눈, 코, 입을 그린다. 아빠의 애절한 충성심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한 대통령의 결단과 카리스마에 대한 예찬으로 이어지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충북 옥천 부근에선 서글픈 애도가 된다. 그렇게 눈물을 훔친 아빠는 목적지인 서울까지 가는 동안 망해가는 조국의 미래를 염려한다. 나는 아빠의 입에서 ‘네가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 찬양과 비관을 밀어낸다. 결말이 없는 이야기는 언제나 ‘정치 이야기만 안..
책을 읽자는 얘기는 이제 하기가 싫다. 출판사를 운영하고 책을 팔아서 먹고사는 입장이지만, 듣기 좋은 이야기도 한두 번이지 계몽적인 어조로 책 읽기의 미덕을 자꾸 설파해봐야 꼰대의 잔소리로 들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요는, 책 안 읽는 시민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 책 읽기 어려운 환경, 책을 읽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기풍이 더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초점을 시민 아닌 당국과 공공기관에 맞추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민이 책을 읽든 안 읽든, 책 읽을 환경을 조성하고 시민 스스로 성장케 할 책무는 정부에 있다. 헌법 제14조에서 22조는 이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국민의 ‘자유’를 촘촘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특히 22조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가 ..
일요일 이른 아침, 나는 엄마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잠이 깼다. 엄마는 다짜고짜 다 큰, 아니 중년이 된 딸에게 지금 어디냐고 물으셨다.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아 자식의 생사를 확인한 사람은 우리 엄마만은 아닐 것이다. 그날 밤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156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피지도 못하고 무참히 꺾여 버렸다.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걷다가 죽을 수 있는가. 이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너무도 어이없는 이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누구라도 갈 수 있었고, 누구라도 당할 수 있었던 평범한 일상 속의 죽음이었다. 정말 아찔하다. 나의 생존은 기적이 아닌가.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하물며 자식을 잃은 부모는, 유가족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이태원 참사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그날을 떠올린다. 그사이 이태원과 서울광장에는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가 설치되었는데, 이름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사고’와 ‘사망자’는 책임을 미루고 지우는 단어다.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가리키는데, 이는 뜻밖에 일어났기에 손쓸 수 없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사망자 또한 “죽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통해 죽음을 단순화시킨다. 그러나 사고가 아닌 참사다. 사망자가 아닌 희생자다.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다. 애통하다. 참담하다. 참사 당시, 국가는 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국가는 왜 책임을 다하지 않았는가. 희생자들의 분향소가 마련되기도 전, 대대적인 온라인 여론전이 이루어졌다. 핼러윈은 외국 전통이 상업적으로 변질돼 청춘의 방종을 ..
나는 경부선 상행 기차를 타면 웃는다. 20년 전 처음 그 기차를 탔을 때 지은 웃음은 드디어 고향을 탈출한다는 승리의 의미였지만, 이제는 그냥 열차에 앉아 있는 승객들의 모습이 웃겨서 웃는다. 부산에서 출발해 대구를 지날 때까진 분위기가 느슨하다. ‘우리가 남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무튼 동대구역까진 ‘서울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같은 출세지향적 설렘이 있다. 그러다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할 즈음 사람들은 시계를 본다. 출발한 지 1시간40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 대전이라니? 내가 생각보다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음을 깨달으며 피로가 급격히 몰려온다. 충청도의 문이 열리고 말투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빈자리를 모두 채운다. 객실이 만원이 되면 계절에 상관없이 열기가 차서 숨 쉬기가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