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창에서 자라나 부산으로 나와서 문현동(門峴洞) 고개 너머 대연중 그리고 동래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대학 마친 뒤, 쫓기듯 사회로 진출해서 몇 개의 우회로를 거쳐 파주 심학산 아래에 정착한 게 한 줄로 요약한 그간의 내 이력이다. 그사이 뾰족한 시간들이 마구 들이닥쳐 서른의 급경사, 마흔의 깔딱고개, 오십의 반고비를 차례로 넘었다. 미로 같은 골목에는 단골집도 많아서 호프집 문지방을 닳도록 드나들던 어느 날의 회심 끝에 산으로 발길을 돌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머리가 하얗게 번질 무렵, 노랗고 붉고 흰 꽃들에게 홀딱 넘어간 것은 더욱 잘한 일. 자연의 꽃은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으로서의 꽃이 아니었다. 세상의 마무리를 담당하는 꽃들, 그 안에 질서 있게 어울린 암술과 수술과 꽃가루. 관찰할..

목포 앞바다에 떡 버티고 있는 압해도(押海島). 우리 국토의 최첨단에서 바다를 제압한다는 뜻을 실천하고 있는 호기로운 섬이다. 오래전, 한 해의 마무리 꽃산행을 압해도에서 했다. 바다 가운데로 풍덩풍덩 빠지는 기분으로 완만한 능선을 걸어가는데 뜻밖의 꽃이 눈길을 끌었다. 해풍에 몸을 맡기며 처연하게 피어난 건 진달래가 아닌가. 그때는 늦가을이라 꽃보다는 열매가 승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홀로 흔들리는 진달래의 꽃을 바라보자니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 꽃은 올해의 지각생인가 내년의 전령사인가. 바로 누군가 던진 한마디에 상황은 간단히 정리되었다. 불시화로다! 올봄부터 계절이 뒤죽박죽되었다는 소식이 여러 곳에서 전해졌다. 개화 순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뒤바뀐 채 피어나기도 하고 한꺼번에 다투어 피기도 했..
무덤 없는 산도 없지만 쓰러진 나무 하나 없는 산도 없다. 앉은키가 따로 없는 나무는 서 있을 땐 그리 큰 줄을 몰랐다. 산이 은밀하게 키우던 꿈 하나가 무너졌는가. 쿵, 쓰러진 나무는 한 마을이 붕괴한 듯 그 규모가 엄청나고 죽어서도 이끼를 키우고 있다. 하늘로 고독하게 걸어간 자들의 최후는 나 따위가 감히 근처에도 얼씬 못할 세계다. ‘지구에는 골목길이 참 많다’(김행숙)지만 저 길은 결국 입안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이 든다. 목구멍에서 넘어온 소리를 공들여 어려운 말로 만들어야 하는 입안은 저 골목만큼이나 복잡하다. 모든 말이란 결국 세상으로 나가 삼시 세 끼 를 구하기 위한 방편인 것. 겨우 획득한 그 먹이를 최종 운반하는 젓가락의 집요한 공격에 처마 밑의 문패 떨어지듯 어느 날 신호가 온다, 흔들리..

산은 생각의 학교다. 네모난 방, 사각의 모니터에서는 만날 수 없는 생각들이 찾아온다. 아침에 해와 동창생처럼 나란히 출발해서 태백산에 오른다. 천제단 앞에서 몰려오는 칼바람에 맞서 오래된 생각에 젖는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8폭 병풍처럼 첩첩이 도열하는 산들. 왜 산은 멀어질수록 작아지는가. 여러 고비를 넘기고도 아직 신통한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다. 그건 그냥 그래서 그렇다는 것으로 여기며 그 질문은 다음으로 넘긴다. 이윽고 온종일 헤매다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와 헤어져 산을 빠져나온다. 하루 만의 졸업생인 양 되돌아서서 공손히 배꼽인사를 한다. 늦은 밤 책 하나를 펼쳤다. (열화당 발행). 태초의 모습 그대로의 산과 그 아래 턱 버티고 있는 산사나이들. 사진사가 사진에 나오지 않듯 책의..

강화도에 밀물 들면, 한강 하구의 여러 샛강에는 물이 역류합니다. 물만 불어나는 게 아니고 어느 날엔 안개도 스멀스멀 자유로를 성큼 건너뛰어 심학산 숲으로 진군합니다. 그제 아침에는 공중이 희붐하고 잔뜩 찌푸렸습니다. 는개인가요? 는개는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안개보다 조금 뚱뚱하고 비보다 조금 홀쭉하다고 여기면 되겠습니다. 그 는개에 몸을 섞으며 둘레길을 걷다가 한 단어가 떠오르는 특별한 풍경을 만났습니다. 미망인이라는 말. 하나하나 새기면 참 잔인하기도 합니다. 무슨 고사에서 유래된 말로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라든가요. 더구나 여성에게만 쓰이는 말이라니요. 해서 국립국어원 사전에는 ‘다른 사람이 당사자를 미망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가 ..

불기 2565년 부처님오신날. 멀리 큰 산에 가지 못하고 사무실 뒤 심학산에 올랐다. 어느새 짙은 녹음. 여러 잎사귀와 잎사귀들 사이로 기이한 모양의 새들이 숨어 있는 것 같다. 호젓한 길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림자 사이로 찰랑찰랑 햇살은 심연의 물고기처럼 뛰어오른다. 그 둘레길의 한끝에 약천사가 있다. 지장보전 처마 끝에 딴 세상으로 가는 입구 같은 풍경(風磬). 그 옆의 글귀가 가슴을 때린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무엇에 묶이고 무엇을 두려워하랴.” 이 문장을 만난 것만으로 오늘 하루는 수지가 맞았다. 이를 다만 아는 것을 넘어 저 뜻을 제대로 체득한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따라 허공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루는 간단히 하루 만에 저문다. 자..

한라, 지리, 설악, 덕유 그리고 계방. 평창의 계방산은 남한에서 다섯번째로 높은 산이다. 오대산보다도 키가 크지만 제 이름을 주장하지 않고 오대산국립공원의 한 일원으로 자리하는 겸손한 산이기도 하다. 아래에서부터 시작하면 힘들기 그지없겠으나 산의 어깨쯤에 해당하는 운두령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운두령, 그야말로 구름의 머리를 만지는 기분이다. 초입에서 가파른 몇 계단을 오르니 고산의 평원에 바로 도달한 듯 남다른 기운이 후끈하다. 후드득 피어난 꽃들도 자세와 씨알이 다른 산에 비해 굵다. 감질나게 한두 개가 아니라 무더기로 피어 있는 당개지치, 얼레지, 홀아비꽃대. 진달래는 색이 아주 선명하다. 저 아래에서는 이미 종적을 감추었겠으나 여기에서는 전혀 새로운 계절 감각을 구가하는 중이다. 그중에서 눈길을 ..

진달래는 이미 다녀갔고 철쭉이 흐드러지게 위용을 떨치는 근황. 지리산 성삼재에서 반야봉,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서 슬쩍 직각으로 몸을 돌려 만복대로 간다. 지리의 장엄한 주능선에 하나 꿇릴 것 없는 길이 휘몰이장단처럼 오르고 내린다. 이윽고 초록의 물감에서 땀에 전 몸을 정령치의 아스팔트 도로로 빼내려는 순간, 휘발유 냄새가 훅 끼쳐오는 인공의 계단 한쪽에 곰을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문이 적혀 있다. 국립공원에서 마련한 저 친절한 그림 속의 곰은 곳곳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쓰여 있기를, “산에서 곰을 만나게 된다면! 갑자기 곰을 만났을 경우 침착한 행동으로 천천히 그 장소에서 떠나도록 하십시오. 계속 가까이 접근해 올 경우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손을 크게 휘두르거나 소리를 질러 사람의 존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