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 아이는 겨울방학 하자마자 베트남 갔어, 엄마하고. ○○이는 며칠 있다가 갔다 온다나 봐.” 큰아이가 다니는 학교, 같은 반에는 꽤 여러 명, 부모가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다. ‘다문화가정’이라고 불리는 집. 엄마가 베트남이나 필리핀에서 나고 자랐다. 서너 명 가운데 한 명꼴로 그렇다. 나라 전체로 보자면 초등학생 서른 명 가운데 한 명, 한 반에 한 명쯤 그런 친구가 있고, 점점 많아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두 나라 말을 익힐 가능성이 큰 아이들이 많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이중언어라거나, 바이링구얼이라고 하는 경우. 모어가 둘인 사람. 물론 한 나라 말만 배울 수도 있고, 아마도 그런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적어도 이 동네 아이들은 그렇다. 아이가 자라면서 처음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전 세계가 경제위기에 직면한 2007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명예교수인 토머스 매크로는 라는 슘페터의 전기를 출간한다. 부제는 ‘요제프 슘페터와 창조적 파괴’였으나 2012년 우리나라에 번역되면서 ‘우리가 경제학자 슘페터에게 오해하고 있었던 모든 것’으로 바뀐다. 경제위기의 발단이 자본주의의 부조리가 아니라 ‘혁신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라고 눙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1883년 같은 해에 태어난 케인스와 슘페터는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신고전학파에 맞선 케인스는 노동자, 더 나아가 민중에 대한 부의 배분이 자본주의의 번영을 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밝혔다. 반면에 슘페터는 신고전학파의 완성자로서 ‘혁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에 반격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사명은 자본이 취하는 불로소득인..
얼마 전 집 창고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비닐봉지를 하나 발견했다. 거즈와 소독장갑이 들어 있는 지퍼백. 고이 간직하려고 잘 두었다가 오히려 잊고 지낸 뜻깊은 물건이다. 지퍼백에 붙은 스티커에는 ‘PAPSIN’이라고 적혀 있다. 잉크 색은 희미해졌으나 고마움은 12년 세월이 흘러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닥터 펩신. 청각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의 인공와우 수술을 집도한 캐나다 토론토 어린이병원 의사이다. 우리가 닥터 펩신에게 그토록 고마워하는 까닭은 비단 수술 결과가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의술이 ‘사람을 살리는 어진 기술’(仁術)이라는 사실을 우리 가족에게 처음으로 확인시켜준 의사였다. 닥터 펩신 덕분에 병원 의사들에 대해 우리가 가졌던 고정관념을 깰 수 있었다. 2005년 봄 큰아이는 중학생이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세계인권선언 제1조) 지금으로부터 69년 전, 1948년 12월10일 프랑스 파리의 샤이요궁(Palais de Chaillot)에 모인 각 나라의 대표들은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희생과 전 세계에 만연한 인권침해에 대해 반성하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존엄과 권리의 최소한을 선언했다. ‘세계인권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2년 뒤인 1950년에 열린 제5차 유엔총회에서 매년 12월10일을 세계인권선언 선포일로 기념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각국에서는 이날을 ‘세계인권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짧은 전문과 30개 조항의 본문으로 이루어진 ‘세계인권선언’은 꼭 한번쯤 읽어볼 만한 글이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시골에 내려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꽤나 어려워했던 것 하나가 말을 알아듣는 일이었다. 아버지 고향이 경상남도여서 어지간한 말은 알아들을 성싶었는데, 이야기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몇 번이나 되묻다가, 약간 과장된 몸짓을 하면서 알아들은 척을 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십 년이 지났으니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처음 듣는 낱말이 적지 않다. 살림을 꾸리느라 가장 매달리는 일은 여전히 책을 내고 원고를 편집하는 일이다. 일할 때에 늘 곁에 두는 것은 국어사전. 그 가운데에서도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이다. 두꺼운 사전을 펼쳐서 하나씩 낱말을 찾아보던 것은 오래전 일이고, 이제는 늘 인터넷 검색을 해서 말을 찾는다. 이렇게 사전을 뒤지고 있으면 늘 마음이 어지럽다. 화가 나고, 어이가 없을 때..
‘그 앞에서는 아무도 이길 가망이 없어 보기만 해도 뒤로 넘어간다. 건드리기만 하여도 사나워져 아무도 맞설 수가 없다. … 지상의 그 누가 그와 겨루랴. … 모든 권력자가 그 앞에서 쩔쩔매니, 모든 거만한 것들의 왕이 여기에 있다. ’ 1588년 잉글랜드 더비셔주 맘스베리에서 토머스 홉스가 태어났다. 당시 잉글랜드는 구교와 신교의 갈등,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립, 스페인 등 구교국가의 지속적인 위협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이 와중에 홉스는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속에 평생을 보냈다고 토로하였다. 그의 역작 ‘리바이어던’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였다. ‘나는 스스로 나를 다스리는 권리를 이 사람 혹은 이 합의체에 완전히 양도할 것을 승인한다. 만인이 만인을 향하여 이처럼 선언하는 것이 달성되어..
캐나다가 살기 좋은 선진국이라고 해서 이민을 왔다. 막상 살아보니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밥벌이의 어려움이나 언어장벽 같은 것이야 미리 예상하고 왔던 터라 새삼 불편해할 바는 아니었다. 통상적인 낯섦과는 별개로 일상생활을 하는 곳곳에 불편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것이 캐나다 사람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일 중 하나가 자동차 운전. 서울 같은 복잡한 도시에서 13년 무사고 운전을 했으니 운전에는 웬만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토론토에는 넓은 길, 좁은 길 가리지 않고 암초가 널려 있었다. ‘멈춤(STOP)’ 표지판이야 눈에라도 잘 띄니 적응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학교 주변에 있는 갖가지 표지판들. 신호등 위나 진..
법무부가 얼마 전 ‘제3차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안)’을 발표하고 이에 대해 시민사회단체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를 열었다. ‘재한외국인 처우 기본법’에 따라 5년 주기로 마련하는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은 앞으로 정부의 외국인 정책을 종합한 밑그림에 해당하는데, 올해 결정되는 ‘제3차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은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적용된다. 법무부는 이번 3차 기본계획의 정책 비전을 ‘국민 공감! 인권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선언하고, ‘상생’ ‘통합’ ‘안전’ ‘인권’ ‘협력’을 정책의 핵심가치로 발표했다. 일단 ‘인권과 다양성 존중’을 기본계획의 정책 비전으로 선언하고, 핵심 가치 중 하나로 ‘인권’을 강조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국내에 체류하는 이주민의 취약한 인권 상황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