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올해 정기국회 마지막 날까지 내년도 예산안에 합의하는 데 실패했다.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 자동 부의제도가 포함된 국회선진화법이 2014년 시행된 이후 정기국회 내 예산안 처리를 못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회의장이 15일 본회의를 마감시한으로 예산안 처리를 압박하고 있지만, 긍정적인 신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예산의 내용과 규모를 두고 ‘새 정부 vs 전 정부’ 구도로 여야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법인세 같은 예산 부수법안에서도 도무지 접점이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과거처럼 해를 넘겨 예산안이 처리되거나, 아예 사상 첫 준예산 편성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선진화’라는 별칭을 따로 붙여야 할 정도로 선진화법 이전의 국회는 그야말로 후진적이었다. 예산 처리 시..
스테디셀러 SF소설 (이하 )는 주인공이 ‘철거’ 위기에 놓인 지구를 탈출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소설 속에서 태양계를 관통하는 ‘초공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철거 위기에 놓인 지구는 주인공이 탈출한 직후 흔적도 없이 파괴된다. 소설 속 이야기지만 개발을 빙자한 무자비한 학살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만한 내용이다. 만약 인류가 실제로 이런 일을 당하게 된다면 아마 “은하계 고속도로의 필요성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지구에 사는 생명 모두를, 지구 자체와 함께 없애면서까지 건설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냐”며 분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인류가 당한 ‘개발 명목의 학살’은 사실 인류가 문명을 이룬 이래 늘 벌여온 일이기도 하다. 굳이 인류사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개발을 위한 철거’라는 이름의 ..
스위스 사회학자로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을 지낸 장 지글러는 저명한 기아 문제 연구자다. 그는 등의 저서들을 통해 기아 문제, 특히 아동 빈곤에 대한 실태와 원인을 집중 조명했다. 그에 따르면 빈곤은 다국적 자본이 제3세계 민중을 착취하는 사회구조에서 기인한다. 또 자본주의에서 소수가 누리는 풍요로움은 제3세계 고통과 빈곤을 기반으로 자라난다.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중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 어린이와 찍은 사진을 놓고 연일 정치권이 시끄럽다. 배우이자 은퇴 후 인권운동가로 활동한 오드리 헵번의 1992년 소말리아 방문 사진을 따라 한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일더니, 현재는 ‘빈곤 포르노’ 표현 논란 속에서 조명 3대가 동원됐느냐, 아니냐까지로 공방이 번졌다. 여권에선 “표현 자체가 반여성적”이..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장을 시민들이 찾아 추모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지난주 ‘책과 삶’ 면 프런트 기사로 신간을 소개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로 모두가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가운데, 이 참사를 함께 슬퍼하고 애도하기 위해 읽으면 좋을 책들을 추천받아 소개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슬픔을 겪은 당사자들의 개인적 슬픔을 다루는 이야기부터, 사회적으로 애도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비난받았던 죽음과 재난, 이타심으로 서로를 도우며 새로운 공동체를 재건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하나의 스펙트럼처럼 다섯 권의 책이 연결됐다. 이태원 참사 관련 사망자가 계속 늘어나고, 진상규명 과정에서 수사를 받던 이까지 숨진 채 발견됐다. 참담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책이 다 무슨 소..
지난달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체활동을 강권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각국 정부가 노력하지 않으면 비전염성 질병(NCD) 환자가 급증한다는 내용이다. WHO는 “2030년까지 5억명이 심장질환, 비만, 당뇨, 우울증, 고혈압 등에 걸릴 수 있다”며 “의료비만 연간 270억달러(약 38조원)씩 소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22 세계 신체활동 현황 보고서’는 194개국을 대상으로 작성됐다. 보고서는 “194개국 중 운동 장려 정책을 만든 나라가 절반 미만이다. 연령대별 신체활동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나라는 30%”라고 적었다. 보고서는 “청소년 81%, 성인 27.5%가 WHO 권장 운동량에 못 미치며 이는 가정, 사회에 큰 부담이 된다”고 덧붙였다. WHO 권장 주당 운동량은 적당한 운동 150분 이..
‘시한폭탄과 크고 작은 부비트랩이 곳곳에 설치된 공장.’ 2014년 6월 해체 작업이 진행되던 일본 후쿠이현 후겐원전 내부를 돌아보면서 든 느낌이었다. 2008년부터 해체를 시작한 이 원전의 내부는 배관, 펌프 등이 얽히고설킨 채 ‘문을 닫은 공장’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당시 원전 내부를 보며 시한폭탄과 부비트랩 같은 단어들을 떠올린 까닭은 원전이 운영과 해체 과정에서 반드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즉 핵연료봉이라는 위험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위험성으로 세계 대부분 국가가 처분시설을 어디에 만들지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는 핵연료봉이 시한폭탄이라면, 다소 위험성은 떨어질지 몰라도 형태와 구조가 제각각인 탓에 다양한 해체기술이 필요한 중저준위 폐기물은 언제 어디서 위험한 상황..
프로이센의 장군이자 전쟁 이론가였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저서 에서 ‘전쟁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고자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전쟁은 정치의 도구이다. 국제 관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본질을 꿰뚫은 표현으로 지금도 널리 회자된다. 그가 분석한 전쟁의 본질과 의미는 결국 피아의 구별에서 시작한다.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가 분명해야 공격과 방어의 상대가 정해진다. 그래야 전쟁의 승리와 패배 주체도 명확해진다. 그런데 최근 적군과 아군 모두를 패배의 길로 인도할 ‘이상한’ 전쟁이 벌어졌다. 무대는 유럽 발트해다. 지난달 26일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옮기는 파이프라인인 ‘노르트스트림’이 파손되며 가스가 누출됐다. 노르트스트림이 망가진 원인으..
오랫동안 청소를 해주신 도우미님이 그만뒀다. 때마침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해 새로운 도우미를 구하지 못했다. 2년 만에 청소도우미를 구하기 위해 매칭 앱을 켜니, 비용이 꽤 올라있었다. 주거공간 청소노동의 가치가 높아졌다는 뜻일 테다. 가사노동자는 오랫동안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았다. 최저임금 적용 대상도 물론 아니었다. 가사노동자는 언제부터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게 됐을까? 불과 네 달 전부터다. 지난 6월부터 ‘가사근로자법’이 시행돼 가사노동자도 노동관계법 적용을 받게 됐다. 가사·청소 일은 삶에 있어서 필수적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노동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여성들의 집안일’로 여겨졌으며, 대표적인 저평가·저임금 노동이었다. 가사노동은 2022년에야 노동법 체계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내. 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