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 공개는 패륜인가 애도인가. 공개하자고 주장하거나 유족 동의 없이 공개를 감행한 쪽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진정한 애도라고 하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패륜이라거나 ‘미친 생각’이라고 비판한다. 개인정보보호법이나 명예훼손 등 법적인 쟁점이나 2차 가해와 프라이버시 등 인권 쟁점은 지난 며칠간 많은 조명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은 공개하자거나 공개하지 말자는 주장에 깔려 있는 정치적 기획이다. 법적이나 도의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정치적 기획이 가진 의도와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자.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촛불을 들고 다시 해야 되겠나”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가 읽히는..
벌써 세 번째이다. 보수 정부에서 위험이 핵심적인 사회현상으로 등장하는 것 말이다.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정부 때에도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지금과는 양상이 달랐다.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던 수많은 사고는 회유 혹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취약한 사회 인프라로 인한 일상의 위험은 숙명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명박 정부 때의 광우병 사태와 4대강 사업, 박근혜 정부 때의 세월호 참사, 그리고 윤석열 정부 들어 일어난 이태원 참사는 이제 고질화해가는 보수 정부의 패턴처럼 느껴져서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이명박 정부는 위험의 사회화와 그 반작용으로서의 위험의 정치화를 최초로 경험했다. 이익을 보는 집단은 분명한데 그에 따르는 위험은 불특정 다수에게로 분산시켜버릴 때,..
푸틴이 더 이상 수세에 몰릴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은 현실이다. 아직은 큰 가능성은 아니지만 침공 초기에 비하면 훨씬 커졌다. 도네츠크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을 병합하고 투표를 통해 합병 찬성을 받은 것은 언젠가 있을지 모를 핵무기 사용을 위한 사전 포석의 성격을 가진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러시아에 대한 직접 공격이고 자위권 차원에서 핵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할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북한의 김정은에게 핵 개발을 지속할 기회와 이유를 동시에 제공했다. 온통 우크라이나에 시선이 쏠린 사이 북한에 대한 감시의 눈길은 느슨해졌고, 복수의 서방 언론은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팔고 있을 뿐 아니라 5만명 수준의 북한인을 러시아군에 참전시킬 예정이라고 보도했..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한 국내 반응은 ‘배신’이라는 한 단어로 모아지는 듯하다. 때로는 동맹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살벌한 표현도 들린다. 친환경 전기차에 주어지는 7500달러 보조금에서 당장 한국산 차가 배제되게 생겼고, 이것은 결국 한국산 전기차의 가격이 1000만원이나 비싸지는 셈이 될 것이라서 미국 내 전기차 판매 2위인 현대차·기아는 물론이고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 전체에도 커다란 부담인 것이 사실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미·중 대립에서 한국은 분명하게 미국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조 바이든 대통령 방한을 전후해 현대차 100억달러와 삼성전자 170억달러 등 한국 기업들의 대대적인 미국 내 투자 약속까지 이어진 직후임을 감안하면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야당은 ..
87년 체제가 문제인 줄 알았다. 선거법이 문제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개헌과 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들 흔히 말하지만, 디테일 속에는 악마도 천사도 함께 있다. 개헌 없이 지금의 법률하에서 정당만 제대로 운영해도 한국 정치를 훨씬 나아지게 할 수 있다. 미국 민주당의 경우를 보면, 대선 후보를 선출할 때 포퓰리즘 같은 일시적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지나간 세 번의 대선에서 주별 득표율을 합산해 대의원 수를 할당하고 지역적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선거인단은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 중 적어도 한 명은 자신의 지역 출신이 아닌 사람에게만 투표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법률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정당의 당헌이다. 공화당도 비슷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다는 조사 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휴가에서 돌아와 13일 만에 가진 출근길 문답에서 대통령이 내놓은 발언들이 원론에 그친 것을 보면 휴가 기간 동안 또렷한 답을 찾지는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당황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쪽이었다. 대통령 지지율이 높다고 해서 꼭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 윤 대통령의 후보 시절 지지율은 역대 대통령의 그것보다 원래부터 좀 낮았었기에 그리 깜짝 놀랄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이 낮은 지지율의 협곡에서 어느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높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지지율은 최고 80%를 찍었고 퇴임 시에도 40%였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이 현 정부 인사들에게 이라는 책의 일독을 권했다고 한다. 이 보도를 접하면서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하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귀순 어민 강제 북송 사건이 불거진 상황이어서 여러 해석이 따라붙는다. 지금 문 전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든, 나는 그가 재임 시절 지정학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가 세계에서 가장 예측 불가능한 두 명의 정치지도자인 트럼프와 김정은을 한자리에 모으고 평양 능라도 5·1종합경기장에 모인 15만 군중 앞에서 연설했을 때, 국민의 3분의 2가 그를 지지했고 과반수가 북한의 약속 이행을 믿는다고 여론조사에서 답했다. 불과 4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 그 후에 벌어진 일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만 돌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하지만 ..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길게 잡으면 10년, 짧으면 5년? 한국인의 마음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특정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아마도 근원적 가치의 상실과 관련되어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징후들은 이런 것들이다. 예를 들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혐오 같은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초창기부터 논쟁적이었던 반면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따라야 할 규범’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86세대가 ‘타는 목마름으로’ 외쳤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옥죄려고 하는 전체주의적 경향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윤석열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