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본 임화의 작품 는 읽어 내려가기조차가 쉽지 않은 면이 있다. 한자어는 한자어대로 난해하고, 구미에서 막 건너온 외국어 고유명사는 오늘날의 독자가 읽기에도 난삽하기 그지없다. 말풀이부터 해보아야 할 판이다. 먼저 이 까다로운 한자 “담曇”은 “흐리다” “구름이 끼다”의 뜻이며, “명일命日”은 곧 “기일忌日”이다. “작코”와 “반제티”는 오늘날의 한국어 문법상의 표기법에 따르면 니콜라스 사코Nicolas Sacco와 바르톨로메 반제티Bartolome Vanxetti이다. 이탈리아 출신 구두 수선공 사코와 생선 장수 반제티는 고국에서의 생활고를 견딜 길이 없었다.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이민자로서 평범한 일상을 지냈으나 1920년 4월 미국 매사추세츠의 한 제화 공장에서 일어난 살인강도 용의자로 체포된..
남아 있는 임화의 전기 자료는 참으로 특이하다. 임화는 18세 이후 저널리즘에 글을 남기면서부터, 그 자료 자체만 전기 자료로 남긴 인물이다. 그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 지인의 회고조차 거의 없다. 임화는 18세 이후 저널리즘에 발표한 글 자체가 본격적인 이력서, 연대기 자료, 전기 자료가 되는 글쟁이다. 그가 스스로 말한 자신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자료는 일체 모아 봐야 다음 두 조각이 전부인 듯하다.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어머니 슬하에 나는 행복된 소년이었습니다. 20세 전후의 청년시대 중학교를 5년급에 집어던지고 난 지 2년 후 어머니도 돌아가고 자산도 파하고 나는 집에도 안 들어가고 서울 거리를 정신나간 사람처럼 헤매였습니다. 괴로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강한 행복에 불탔습니다. _, 1938..
임화(林和, 1908~1953.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스무 살에 이미 영화/연극/미술 평론을 시작해, 스물한 살에는 이미 프롤레타리아 문학론의 주요 논객이 되었으며, 대선배 김기진과 박영희의 문학론을 차례로 제압하고 조직 주도권을 장악해, 1932년 스물네 살의 나이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KAPF) 서기장에 오른 임화의 얼굴이다. 임화는 1908년 10월 13일 서울 낙산 아래, 그러니까 오늘날의 서울 동숭동에서 태어났다. 해방공간에서도 좌는 물론 우를 일정정도 포괄한 문학 조직 활동의 선편을 쥐고 있었지만 박헌영 노선에 따라 월북해 해주에서 남로당 활동(대남 공작을 포함한 활동이었는 듯)하는가 하면, 북의 중앙에서는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활동 등을 활발히 펼쳤다. 임화는 195..
김우진(金祐鎭, 1897~1926). 1920년대 그 누구보다도 뜨겁고 환한 문학 불꽃을 사르다 스스로 세상을 버린 김우진의 얼굴이다. 한국 희곡사-연극사 연구에서 우뚝한 업적을 남긴 연구자 유민영은 김우진에게 “기성 문단을 훨씬 뛰어넘은 선구적 극작가”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점에서는 유일한 극작가”라는 평가를 부친 바 있지만, 김우진의 문학 활동은 오늘에 견주어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김우진은 1897년 전라남도 장성군 관아에서, 장성군수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성규는 군수였을 뿐 아니라 대지주였고 슬하에 11남매를 둔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김우진에게는 집안의 적장자嫡長子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정을 이끌어야 할 가부장의 의무가 있었다. 이는 숙명이었다. 이때 대지주의 가정이란 ..
김기림(金起林, 1908~?), “모던뽀이” “모더니스트”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시인 김기림의 얼굴이다. 김기림은 1920년대에는 니혼日本 대학 문학예술과에서, 1930년대에는 도호쿠東北 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했는데 졸업해 귀국한 뒤인 1930년과 1939년의 얼마간 조선일보에서 일했다. 이 사진은 1939년 조선일보 재직 당시에 찍은 듯하다.김기림의 시 쓰기, 시집 내기는 꾸준했다. 1934년 첫 시집 을 펴낸 뒤, 1936년 시집 , 1946년 시집 를 거쳐 1948년 마지막 시집이 된 들을 낼 때까지, 아무튼 시인 김기림은 꾸준히 쓰고 냈다. 하나 그에 대한 평가가 후한 것만은 아니다. 서울대학교 국문과 조동일 교수는 일찍이 김기림식 모더니즘 문학론 및 시 작품에 대해 “현실 인식의 정당성..
정지용(鄭芝溶, 1902~?). 어느결에 독서와는 영영 인연을 끊어버린 아저씨나 아줌마라도, 내가 한국어와 무슨 상관이 있소, 정신으로 잘살고 있는 십대 껄렁패라도 그 이름만큼은 알고 있는 시인 정지용. 이 사진은 정지용이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이십대 말 또는 삼십대 초에 찍은 것으로 짐작된다. 아저씨•아줌마에서부터 십대 껄렁패라도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된 데에는 그의 시 가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노래와 교과서에 새겨진 대표적인 한국어문학사 유산 . 읽지 않고 넘어가면 섭섭하리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이광수(李光洙, 1892~미상), 한국 문학사에서 근대적 장편소설의 효시로 평가되는의 저자 춘원春園 이광수의 얼굴이다. 1932년 그의 나이 마흔하나에 찍은 사진에서, 얼굴에 초점을 두고 따냈다. 연구자 김윤식 교수는 (초판 전3권, 한길사, 1986/개정증보판 전2권, 솔, 1999)에서 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은 우리 근대소설의 문을 연 작품이기에 문학사적인 의미에서 기념비적이며 작가 춘원의 전생애의 투영이기에 춘원의 모든 '문자행위' 중에서도 기념비적이 아닐 수 없다. 은 시대를 그린 허구적 소설이지만 동시에 빈틈없고 정직한, 고아로 자라 교사에까지 이른 춘원의 '자서전'이다. 그 자서전은 그대로 당시 지식청년들의 자서전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_김윤식, 2에서(한길사판) 은 1917..
홍명희(洪命憙, 1888~1968), 의 저자로 유명한 벽초碧初 홍명희의 얼굴이다. 1930년대에 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에서, 얼굴에 초점을 두고 따냈다. 홍명희는 10대를 지나서는 완전히 대머리가 된 듯하다. 그의 “번대머리”는 지인과 대중 사이에서 일종의 아이콘, 트레이드마크 노릇을 했다. 명문 풍산 홍씨의 후예인 홍명희는 1888년 7월 3일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집안에서 전통적-정통적 한문-유학 교양을 익히며 자랐다. 더욱이 홍명희의 할아버지 홍승목, 아버지 홍범식 모두 정식으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과거 시험과 조정 출입과 중세 행정을 경험했으니 이름뿐만이 아닌 진짜배기 양반 출신인 셈이다. 홍명희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다섯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