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개 이름은 나무였다. 영화배우처럼 멋진 갈색털과 군살 없이 당당한 몸매를 가진 개다. 그래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질 만큼 맑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문득 ‘영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당연하지만 숲이나 들, 고랭지 채소밭의 가장자리, 하다못해 흔해 빠진 길 한복판에 그 개가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걸 보면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멋져 보였고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게 사진을 찍게 된다. 그런 개였다. 나무는…. 그런 개가 심지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다정하기까지 했다. 멀리서 손님이 굽이굽이 산 아래까지 낯선 길을 더듬어 달려오면 ‘까칠한’ 주인의 결점을 채우듯 개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말없이 숙소 가는 길을 안내해 주는 일이 일상이었다. 심지어 나무가 거실문 앞에 말없이 앉아서..
역시 안 버리기 잘했다. 비좁은 옷장 안에서 거의 10년 가까이 선택받지 못한 채 ‘애물단지’인 양 홀대받던 옷들이 요즘 다시금 ‘새롭게 주목받는 복고’란 의미의 ‘뉴트로’ 혹은 ‘힙트로’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다. 예컨대 촌스러울 정도로 로고가 크게 박힌 맨투맨 티셔츠며 빈티지 체크 스커트, 본의 아니게 바닥 청소하기 좋을 만큼 품이 넉넉한 ‘배기 팬츠’ 같은 아이템들. 한때 C 브랜드의 프레스 세일 중에 샀던 과장된 어깨선의 오버사이즈 모직 코트는 좀 아깝게 됐다. 아무리 유행이 돌아와도 다시 입을 것 같지 않은 그 육중한 무게감에 질려서 어느 유난히 추운 겨울에 우리 개들 이부자리로 내주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해 유난히 내 마음에 와 닿았던 H&M의 글로벌 캠페인 슬로건 “패션..
프랑스인들만의 멋지고 세련된 느낌을 표현하는, 프렌치 시크(French Chic)라는 말이 있다. 그것이 패션에 강한 다른 장소, 예컨대 뉴욕 시크나 이탈리아 시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무심함’에 있다고 한다. 멋있으려 애쓰지 않는데 그냥 저절로 멋스러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멋’이라고 해도 좋겠다. 혹은 ‘방치된 무심함’의 뉘앙스마저 철저히 계산하는 프랑스인들 특유의 지적 허세나 섬세한 태도에 있거나. 실제로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나라 전체를 이끄는 힘 자체가 패션에서 나온다고 해도 좋을 만한 ‘패션의 나라’지만 그걸 상쇄시키려는 듯 언제 어디서든 작정하고 ‘지성’을 강조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패션의 도시에서 살지만 패셔너블해 보이기보다 편안하면서도 지성적인 자기다움을 발산하는 걸 ..
인터넷 시대를 살면서 지금까지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20년 전의 네이버 지식인. 그리고 요즘의 유튜브. 어느덧 네이버 시대는 저물고 이제는 ‘유튜브 시대’라는 얘기는 심심찮게 들었지만 이제야 그걸 제대로 실감하는 중이다. 우연히 유튜브로 ‘씽씽’을 본 것이 일주일 전. 놀라워라. 한창 때의 글램록을 연상시키는 여장 남자 둘과 여성 보컬이 분명 타령조의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내 눈과 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세계를 만난 듯 좋아했다. 우리나라 민요가 이렇게 펑키하고 사이키델릭하게 들릴 수 있다니…. 우리 민요가 해학과 정제미마저 갖춘 ‘솔 음악’ 혹은 월드뮤직으로 업그레이드가 된 느낌이었다. 이름하여 민요록 밴드 씽씽(Ssing Ssing)이라 불리는 6인조 밴드였는데, 유튜브에 씽씽이라고 치면..
공교롭게도 내가 살면서 이른바 ‘소확행’의 절정을 경험한 날은 2003년 4월1일 홍콩 출신 중국 배우 장국영이 투신 자살한 날과 정확히 일치한다. 장국영이 내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데 장국영을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하루종일 말할 수 없이 울적했고 또 겁나게 무기력했다. 뱃전에 파도가 부딪치는 것처럼 천국의 속삭임인 듯 느릿한 하와이안풍 기타 연주곡 ‘Maria Elena’가 멀리서부터 계속 들려왔고, 귓전에서는 맘보 춤을 추던 ‘아비’의 대사도 끊임없이 재생됐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죽음이 진정한 휴식인 양 유혹하는 의 명대사…. 그런데도 그날 밤 나는 친구들과 간장게장에 소주를 마시며 행복했..
예전부터 그랬다. 직업상 조지 나카시마나 핀 율, 한스 웨그너 같은 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디자이너 가구에 대해 줄줄이 꿰고 있는 남자들을 주로 만났지만 나는 실상 그들보다는 나무 그 자체에 대해 잘 아는 남자가 더 좋았다. 자신의 직업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그저 식물을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기회 닿는 대로 더 깊이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남자. 그 때문에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지기도 하는 남자. 예컨대 격렬했던 오전 업무가 끝나고 동료들과 가벼운 산책 중에 모감주 나무 아래에 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남자. “옛날에 고려사를 보면 사신이 조공을 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져간 물품들이 비단·한지 등인데 그럼 중국에서 거꾸로 답례로 오는 것 속에 모감주 몇 ..
2009년의 일이었다.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는 노르웨이의 서남부 해안도시 베르겐에서 수도 오슬로로 가는 기차 맨 앞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러곤 무려 7시간 동안이나 기차가 보여주는 창밖의 풍경을 담아 아무 편집 없이 ‘베르겐 기차 여행(Bergen Line)’이란 제목으로 내보냈다.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눈 덮인 풍경만 무료하게 계속 나오는 방송이었다. 그러다 기차가 터널을 지나갈 때면 화면이 아예 깜깜했고 열차가 멈추었을 때는 그대로 정지 화면뿐이었고.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시청률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 무료하기 짝이 없는 프로그램을 ‘슬로 TV’라 명명하며 너무나 좋아했다. 실제로 시청률이 15%나 나왔다. 그러한 인기에 힘입어 거대한 크루즈 배가 노르웨이 피오르 해안..
당신은 지금 시애틀 공항에 와 있다. 목적지는 알래스카. 한국에서 출발하는 알래스카행 직항 노선이 없기 때문에 시애틀에서 10시간 정도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다. 경유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곳이 잠 들기 싫을 만큼 매력적인 항구도시 시애틀이라는 사실은 예기치 않게 받은 ‘리본 달린 일요일의 선물상자’ 같은 느낌이다. 안타까운 점은 나의 모든 살아 있는 감각으로 시애틀이라는 도시를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겨우 반나절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면, 과연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겠는가? 10년 전 이맘때 나는 그런 행복한 고민 속에서 시애틀을 대표하는 작은 항구에 가서 물고기 요리를 사 먹었고 관광객이 거의 없는 평범한 동네를 산책하며 ‘시애틀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아주 조금 음미해 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