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시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온 것은 4월18일 새벽이었다.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절망으로 가득한, 보는 사람마저 우울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4월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가 섬세하고 여린 그녀의 영혼을 갈래갈래 찢어버린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그녀는 17일 내내 곡기마저 끊었던 것 같다. 수많은 어린 생명들을 포함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우리 곁을 떠나갔으니, 어떻게 밥과 물이 입으로 들어오겠는가. 어떻게 붉고 노란 봄꽃과 푸르고 높은 하늘이 눈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해소할 길이 없는 슬픔과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분노, 그것이 그녀가 내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이유일 것이다. 무슨 말로 시인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녀와 통화를 마친 뒤, 한 달 전 광주광역시로 강연을 간 ..
2000여년이나 되었을까. 중국 한(漢)나라 시절 왕소군(王昭君)이란 궁녀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나라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다지 강건하지 않았다. 주변 이민족들, 특히 흉노부족의 무력에 항상 전전긍긍하고 있을 정도였다. 왕소군이 흉노부족에 반강제적으로 시집을 간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땅도 물도 낯설기만 한 흉노 땅에서 그녀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젠가 중국으로 돌아가리라 꿈꾸지만, 그 언젠가는 도래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탄식과 절망으로 시들어가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다시 흉노 땅에도 봄은 찾아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서러운 땅에서도 어여쁜 꽃들은 속절없이 피어난다. 화려한 자태와 그윽한 향기를 뽐내는 꽃들은 왕소군의 쓸쓸한 마음을 더욱 도드라지게 할..
인문학에 대한 열풍이 가실 줄 모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 왜 인문학에 대한 갈망이 그렇게 강해졌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하곤 한다. 20대 초반, 혹은 대학생이었을 때의 지성과 감성을 회복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 아니겠느냐고. 한마디로 지금처럼 속물이지 않았을 때의 지성과 감성을 안타깝게 그리워하는 것, 달리 말한다면 계속 속물로 타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30대에서부터 50대까지의 내면을 지배하는 인문학 열풍은 전혀 이해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속물은 모든 것을 이해관계로 재단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돌아보라! 회사 초년병에서부터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속물이 많은가. 이런 경향은 이해, 즉 이득과 손해를 유일한 ..
철학은 사랑이다. 철학의 영어 표현인 필로소피에 이미 사랑을 뜻하는 ‘필로’가 들어 있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상기시키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는 단지 철학자는 무엇을 사랑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국가도, 자본도, 관습도, 체제도 아니다. 철학자가 사랑하는 것은 ‘덧없고 사소한 것’이나 ‘쓸모없는 실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철학자의 사랑이 싸구려 동정이라고는 오해하지는 말자. 철학자의 사랑은 ‘덧없고 사소한 것’을 영원하고 중요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 혹은 ‘쓸모없는 실존’을 가장 쓸모 있는 실존으로 격상시키려는 분투이기 때문이다. 만일 철학자의 사랑이 그 결실을 맺는다면, 덧없고 사소한 것들이나 쓸모없는 실존들을 자기 부정이 아니라 당당한 자기 긍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모든 진지한..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이다. 선거를 통해 일시적이나마 권력을 획득한 대표자들이나 자본 집중을 통해 권력을 휘두르는 자본가들이 아니라면,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겠는가. 그렇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독점이 아니라 분산을 지향하는 정치 이념이다. 군주제도나 독재정치가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군주나 독재자는 항상 권력을 국민들에게 나누어주기보다는 자신에게만 집중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분업 논리가 와해되는 정도로 측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만 ‘지배자=피지배자’라는 현기증이 나는 역설적인 도식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점적 자본을 통해 권력을 휘두르는 자본..
제논의 역설을 아는가. 바람처럼 빠른 아킬레스도 자기보다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결코 추월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보다 100m 뒤에서 출발한다고 하자. 자! 경주가 시작되었다. 아킬레스가 100m를 달려 거북이가 있던 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거북이는 출발선에서부터 10m를 가고 있었다. 그 다음 아킬레스가 출발선에서부터 1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거북이는 이미 출발선에서부터 11m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거북이는 아킬레스가 10m 달리는 동안 1m를 달렸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추론하면,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100m라는 구간, 10m..
사랑만큼 강한 감정이 또 있을까. 사랑, 혹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죽음마저 불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예가 사랑에 빠지는 것, 혹은 자식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억압적인 주인이나 권위적인 부모에게는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노예나 자식은 외적인 권위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일체의 외적 권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혹은 자유의 힘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과거 권위적인 사회는 구성원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을 극히 꺼렸던 것이다. 노예는 주인이 원하는 짝과 결혼을 해야 하고, 자식도 부모가 정한 상대와 혼인을 해야만 했다. 부르주아 시민사회가 등장했을 때 인류가 환호했던 것은 바로 자..
철학자인지라 지루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을 양해하시기를. 그건 자유민주주의라는 사생아적 개념과 관련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생아적 개념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질적으로 상이한 원리들이 야합해서 탄생한 개념이니, 분명 자유민주주의는 사생아적 개념이다. 먼저 이 사생아를 낳은 부모를 이해하는 것이 순서겠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긍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소비의 자유를 긍정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돈을 가진 자가 자기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다는 원리가 바로 자유주의이다. 결국 돈이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커다란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진정한 주체가 사람이라기보다는 자본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주주총회를 예로 생각해보자. 한 사람이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