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선례가 하나 생겼다고 생각한다. ‘시민혁명’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지만, 과연 사태가 이런 정의에 부합하는 것인지 논의를 아껴둘 필요가 있다. 김수영의 시 구절처럼,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불현듯 오는 것이고 가시적인 힘들을 통해 항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혁명은 “밤에 지나간 배”처럼 조용히 온다. 혁명은 평소에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규정된 것들이 무한하게 분출하는 정황이기도 하다. 이런 혁명의 모양새에 비추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당장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방만 바꾸는 일이 있더라도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현실이 호락호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통령에게 쏠려 있는 시선 덕분에 정작 중요한 문제가 부각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사태의 원인은 대통령 자신이다. 그러나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지금까지 대통령의 문제를 까맣게 몰랐다는 듯이 구는 보수 언론들이다. 반추해보면, 이상 징후는 취임 초기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인수위 시절부터 엇박자가 빈번했고, 외교 분야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세월호 정국에서 드러난 무능이나 대북정책에서 보여준 모순은 이 정부에 문제가 있고, 그 원인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이 대통령을 독대한 적이 없다는 발언은 충격적이라기보다 ..
지난 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미국의 가수 밥 딜런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온갖 추측을 일순에 잠재운 놀라운 결론이었다. 1964년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가 공식적으로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것만큼이나 충격이었다. 이번 수상 결정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문학상’을 ‘가수’가 수상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음유시인을 예로 들면서 밥 딜런의 수상을 정당화했지만, 궁색한 논리일 뿐이다. 엄연히 오늘날 ‘문학’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고대의 시나 글과 다른 근대적인 글쓰기 체계이고, 수상 대상을 결정한 이들조차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어차피 ‘문학’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주장은 어딘가 어색하다. 의도야 무엇이었..
결국 정부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고, 외교안보 불안을 우려하는 국내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정부는 강행할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일방적으로 배치 지역으로 통고받은 성주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았다. 항의 시위가 잇따랐지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단호한 의지를 재천명했다. 중국이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일각의 우려를 일축하면서 북한의 미사일로부터 남한을 지키기 위한 조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대통령 담화가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다. 그러나 속속 드러나고 있는 사실관계는 이런 대통령의 자신감을 의구심에 빠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익숙한 ‘안보’ 논리를 내세웠지만 정작 사드는 수도권 방어용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미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장..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프로불평러’라는 말이 있다. 다양한 의미역을 가지고 쓰이긴 하지만, 대체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주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이를 일컬어 ‘프로불평러’라고 부르는 것 같다. 프로페셔널과 불평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영어식 조어로 만들어낸 이른바 ‘언어파괴’형 농담이라고 할 수 있다. 농담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 말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중2병’ ‘쿨병’ ‘설명충’ 같은 인터넷 용어들과 함께 특정 개인의 행동을 규범적으로 재단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말하자면, ‘프로불평러’라는 말은 최근 인터넷에서 두드러진 현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인 셈이다. 과거에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이 규범 파괴의 장이었다면, 불과 10여년이 흐른 뒤에 이 장은 역설적으로 규범을 생산하고 강제하..
어릿광대인줄만 알았던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미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트럼프를 미치광이 취급했던 이들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이 본선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트럼프 현상이 무시할 수 없는 상승력을 가진 실체적 열망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미국은 대체로 리버럴리즘과 보수주의가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해온 국가이다. 급진주의를 배제한 보수 양당 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보편 모델로서 추앙받아 왔다. 이런 자유민주주의는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이 반파시즘 전선에 동참하면서 가치화되었고, 냉전시기를 통과하면서 확고한 ‘자유 진영’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트럼프 현상은 이렇게 미국 주도의 전..
들끓던 4·13 총선이 끝났다. 여당 압승이 예측되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총선 전 이 지면에서 “이변을 기대한다”고 썼던 나의 예상은 맞았다. 그러나 나의 기대를 넘어선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클릭한 정의당을 제외하고 노동이나 환경 문제를 의제로 설정하는 ‘진보정당’은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왜 ‘진보정당’은 유권자를 매혹하지 못하는 것일까. ‘진보정당’에 무관심한 유권자를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진보정당’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지금 현재 한국에서 ‘의회정치’라고 부르는 민주주의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번 투표는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말만 총선이지 실질적으로 차기 대권주자들의 ‘체력장’에 가까웠다. 유권자들은 권력교체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사분오열되었을망정 야권에 표..
이번 총선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여야의 구분이 따로 없다는 점인 것 같다. 여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있다. 선거라는 공간이 열리자마자 평소에 숨어 있던 긴장들이 모래알처럼 분열했다. 과거 같으면 민주 대 반민주로 나뉘어서 야당과 여당이 명분 싸움을 했겠지만, 이제는 야당이든 여당이든 다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심판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 심판의 근거는 바로 경제이다. 야당이 경제 문제를 정부와 여당의 정책 실패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여당은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법안을 제때에 통과시켜주지 않은 야당의 책임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설득력으로 치자면 여당의 주장은 다소 억지스럽다. 여당 관계자들도 인정하듯이, 지금 현재 불거지고 있는 양극화나 청년실업 문제, 그리고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