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도쿄대 한국연구센터와 언론학부가 공동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2세대 학자인 크라우스 오페 교수와 더불어 기조 발표를 했다. 그는 세계적인 정치사회학자이자 민주주의 이론가이다. 덕분에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문제들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다. 오페가 독일을 포함하는 선진민주주의 국가들의 경험을 토대로 말했던 것에 비해, 필자는 신생민주주의 국가로서 한국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말했다. 핵심은 필자가 ‘시민운동적 민주주의관’이라고 불렀던, 뉴미디어의 효능을 앞세운 운동 중심의 민주주의관과 그것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시각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 모두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이론가’..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스필버그의 영화 은 한 위대한 미국 대통령을 과거로부터 불러내어 오늘의 시점에서 그의 행적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여러 제도를 미국으로부터 가져왔기 때문에 제퍼슨이나 매디슨 같은 건국 1세대 지도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최근에는 복지국가와 노동문제가 한국 정치의 중심 이슈로 부상했기 때문에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링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정치가일까.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갈등이라는 배경이 우리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되기는 어렵다. 그런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스필버그의 링컨은 우리가 링컨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좋은 대답을 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민주주의..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새 정부 출범을 보면서, 나는 야권 입장에서 지난 선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여러 여론 조사에서 나타났듯이, 절반을 훨씬 넘는 유권자들이 정권교체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대선은 패배로 끝났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가 손짓했지만, 이를 자기 것으로 거머쥘 수 있었던 담대한 능력, 즉 비르투(virtu)는 없었다. 민주진보파 그룹들의 기대와는 달리, 선거 결과는 이념적 진보성, 민주 대 반민주, 진정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누가 더 실제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력이 있고 신뢰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경쟁, 즉 정당의 실력에 대한 평가가 지배했다. 그런 점에서 지..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권력을 향한 치열한 대선 경쟁이 끝난 지금은 좀 더 원론적인 문제들을 되짚어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지적 자원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한다. 어떤 주제가 적합할지 생각하면서,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이라 할 라는 책이 떠올랐다.애초 이 책은 로버트 달이 1970년 출판했는데, 책 제목에서 말하는 혁명이란 1960년대 미국의 반체제 운동을 지칭한다. 이 시기를 통해 급진파들이 이상화했던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이 책은 급진파 정치론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서로 평가되기도 한다. ‘좋은 사회에서의 권위’라는 책의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의 중심 주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왜 권위가 중요한지,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에 부응하는 권위를 어떻게 ..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이번 대선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안철수 현상이었다. 무엇이 그 현상을 가능케 했나. 그것은 기존의 그 어떤 정당도 하지 않았던 문제를 제기한 때문이고, 그 점에서 안철수 현상은 기존 정당들의 실패가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안철수 현상은 기존의 국가 중심적이고 재벌 편향적인 성장정책하에서 누적돼 왔던 청년 문제가 표출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청년들의 사회경제적 생존 문제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실존적 고뇌와 위기에 진심으로 반응했고, 그것을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어 경제민주화, 복지, 교육, 노동 문제로 다뤄질 수 있게 했다. 물론 안철수에 대한 지지를 뒷받침했던 것은 청년세대만이 아니었다. 기존 정당들에 비판적인 유권자 집단 내지 스스로를 중도라고..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다음 임기 동안 우리 사회를 이끌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는 대선이 되면, 한국사회는 어디로 가야 하나, 경제는 어떻게 하고 교육과 복지에는 어떤 청사진이 필요한가 하는 등의 큰 문제들이 제기되곤 한다. 그럴 때면 개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진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최근에는 진보-보수와 여-야를 초월해 사회 각계의 ‘원로’들이 모여 합동으로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개헌이 지금 그렇게 필요한 것인가? 우선 그 전에 원로들이 집단적 의사를 표명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말하고, 현실 정치를 계도할 사명감을 갖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원로들의 개헌 문제 제기는, 스스로 어떤 최선의 국가 목표를 상정하면서, 그에 ..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한국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극단적인 불확실성에 있다는 점이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후보가 결정되는 과정은 무정형적이고 불가예측적이다. 선거를 100일도 안 남겨 놓은 지금, 여전히 후보가 불확정적이라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병리적 측면을 반영한다. 앞으로 무슨 사태가 전개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한국정치이기 때문이다. 모든 후보들이 복지국가, 양극화 해소, 반값등록금, 재벌개혁,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는 현실이다. 보수적인 후보나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후보나 할 것 없이 같은 공약을 내세우는 선거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당 해체의 현상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당을 지배하는 것은 캠..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대통령의 책임성 부재는 한국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민주정치는 대표의 선출과 함께 선출된 대표가 그를 선출해준 투표자들에게 책임지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인 로버트 달(Robert A. Dahl)은 선거 때만이 아니라 선거와 선거 사이, 즉 평상시에도 선출된 통치자가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점을 강조했다. 선거 때만 민주주의가 있고 평상시에 없다면, 그것은 왕을 선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상시에도 책임정치가 구현되는 좋은 정부를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4년 중임제로 개헌하자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선거제도를 바꾸자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정부형태를 아예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