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실종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협약’(강제실종방지협약)이 지난 12월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17년 제3차 유엔 보편적 정례인권검토(Universal Periodic Review·UPR) 심의에서 우리 정부가 강제실종방지협약 비준·가입 권고를 받고, 2018년 3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수용 의견을 밝힌 이후 4년 반이 걸렸다. 대한민국 헌법 제6조 제1항은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어 앞으로 강제실종방지협약과 충돌하는 국내 법률을 개정하는 후속 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유엔총회에서 통과된 국제인권조약 중에서 가장 중요한 9개를 선별해 ‘핵심 국제인권조약’으로 정하고 있다. 핵심 인권조약은 인간..
2022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이제 산골 마을 논과 밭은 모두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아이고, 농사일이 오데 끝이 있는가. 고마 죽어삐야 끝나지.” 마을 어르신들이 죽어야 끝난다던 농사일도 잠시 방학이다. 이젠 틈틈이 뒷산에 가서 내년 가을까지 아궁이에 넣을 장작을 하거나 밭두둑에 비닐 대신 쓸 부엽토를 긁어 놓으면 된다. 그리고 장날에 가서 겨울 간식으로 먹을 옥수수와 현미 뻥튀기를 하고, 무를 썰어 겨울 햇볕에 말릴 때이다. 밤이 오면 아내랑 돋보기를 쓰고 벌레 먹거나 쪼그라진 녹두와 팥을 가려내고, 빛깔 좋고 잘생긴 녀석들은 미리 주문한 분들한테 택배로 보내야 한다. 가끔 두더지가 파헤쳐 놓은 마늘밭과 양파밭에 가서 두둑을 꾹꾹 밟아 준다. 그래야만 긴 겨울 내내 뿌리가 얼어 죽지 않는다. 농약..
동기부여 강사는 자신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임을 부단히 강조하더니 급기야 일찍 일어나는 사람 중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황당한 주장을 당당히 펼친다. 피식 웃음이 났다. 20년 넘게 새벽 3~4시에 기상 중인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일찍 일어나는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찍 일어난다는 거 하나다. 무엇을 실천했다면, 그건 늦잠을 잔들 낮잠을 잔들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에 급급해지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 자체를 무작정 ‘좋고, 대단하고, 바람직한’ 사람들의 특징과 연결한 후 반대편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논리를 이어간다. 자동차를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의 특징은, 자동차를 아끼는 거다. 세차를 자주 하는 사람의 특징은, 세차를 자주 하는 거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파업인가. 민주노총의 오만한 대국민 협박에 진저리가 난다.” 지난 22일 국민의힘은 최근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이 같은 논평을 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귀족노조’ 프레임을 다시 들고 나왔고, “생때같은 줄파업” “불법투쟁” “대국민 갑질” 등의 발언이 여당 쪽에서 일제히 쏟아졌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화물연대 파업과 관련해 ‘불법’과 ‘폭력’으로 규정했다. 학교 급식조리사들이 노동을 중단하고, 화물차들이 운송을 멈추고, 건강보험 고객센터 노동자들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지역난방 열배관을 점검하는 일이 중단됐다. 이러한 ‘물리적 타격’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폭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거꾸로 누가 노동자들의 파업을 폭력으로 규정하는지 그 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익’..
한국에 머무는 외국인이 지난 9월 기준 217만명을 넘어섰다. 2019년 250만명으로 가장 많았다가 코로나19로 감소한 이후 올해부터 다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얼마 전 정부도 내년 외국인노동자 입국 허가 인원을 역대 최대인 11만 명으로 결정했다. 2025년이면 국내 체류 외국인 숫자가 250만명을 넘어 역대 최고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이주배경 인구가 전체 인구의 5%를 넘으면 공식적으로 다인종 국가로 분류되는데 한국도 정말 머지않았다. 국경을 오가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 출입국 행정이다. 외국인이 한국에 입국하려면 법무부 장관이 발급한 사증(비자)이 있어야 한다. 실무적으로는 법무부 장관의 위임을 받은 각 나라의 영사가 비자 발급 권한을 가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11월12일(토), 경남 창원 합포여중 교사 세 분이 학생 스무명을 데리고 ‘문학기행’을 오기로 한 날이다. 아내와 나는 이른 아침부터 손님맞이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산골 마을에 뿌리 내린 지 17년이 지났지만 우리 마을엔 학생이 한 명도 없다. 다른 마을도 거의 마찬가지다. 지구촌 돌림병(코로나19)으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던 도시 학생들과 교사들이 올해부터 가끔씩 찾아오고 있다.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 일인가. 어느덧 오전 9시40분이다. 반가운 손님맞이하느라 지나가던 바람도 잠시 멈추고, 마을 텃새들이 노래를 부르고, 개가 짖고 소가 울어댔다. 드디어 참나무 아래 넓은 쉼터에 버스가 섰다. 학생들이 하나둘 내렸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난 뒤, 한 줄로 서서 ..
나쁜 문화는 ‘나쁜 걸’ 장려한 결과가 아니다. “여자들은 문제가 많아”라는 성차별적 인식은 기질적으로 여성이 싫은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성성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파생된 편견이다. 남자는 이렇게 해야지 멋있다는 식의 주문이 많으면 “남자가 그것도 못해?”라는 핀잔에 이어 “너 여자야? 그런 것도 못하게”라는 빈정거림이 자연스레 등장한다. ‘천생 여자’라는 감탄사를 제어하지 않고 성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건 소용이 없다. 사회적 문제에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반대의 힘이 존재한다. 그걸 찾지 않는 해법은 소 잃고도 외양간조차 고치지 않는 격이다. 외모 지상주의가 사라지길 원한다면 사람의 얼굴, 몸, 옷차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부터 짚어야 한다. 잘생긴 사람에게 환호하고 몸매..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8년 만에 또다시 수많은 때 이른 죽음들을 목격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망자의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59명, 146명, 151명. 이태원 참사 소식이 전해지면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먼저 떠올랐고, 그 뒤를 이어 유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월호 참사, 대구지하철 참사, 산재 유가족들의 얼굴들. 대구지하철 참사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들으며 오래전 자신이 겪은 참사의 고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숨을 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기이하게도 끔찍한 재난일수록 피해자들에 대한 악의적인 말들이 튀어나온다. 놀러갔다가 죽었다는 말이 무심코 던져지는 사회에서는 일하다 죽었다는 말도 무겁게 다뤄지지 않는다. 생존자는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기도 하고, 구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