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기를 끊고 누운 사람처럼 대지는 속을 비워가고 바람이 그 꺼칠한 얼굴을 쓸어본다 돌아누운 등 뒤에 오래 앉았는 이가 있었다 아― 해봐요 응? 마른 입술에 떠넣어주던 흰죽 세상에는 이런 것이 아직 있다 허은실(1975~) 겨울은 살아 있는 것들에겐 시련의 계절이다. 생존을 위해 활동을 최소화하고 에너지 소모를 줄인다. 식물은 나뭇잎을 떨구거나 겨울눈으로, 동물은 잠을 자거나 알·애벌레·번데기 상태로 겨울을 난다. 생기를 잃은 대지는 “곡기를 끊고/ 누운 사람” 같다. 아니 스스로 곡기를 끊고 오래 돌아누운 사람. 죽을병에 걸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많이 서운한 듯하다. 몸이 아프면 평소 아무렇지도 않던 말과 행동이 서운하다. 달래느라 진을 뺀다. 오랜 설득에 얼굴 꺼칠한 사람이 흰죽 ..
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 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 수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 김상미(1957~) 녹은 공기 중의 산소에 의해 산화, 즉 부식되면서 생긴다. 상온에 40% 정도의 습도가 필요하다. 철은 붉은색, 구리는 녹청색의 녹이 스는데 시인은 이를 “쓸쓸함의 색깔”이라 한다. 쓸쓸함은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찾아온다. 사랑의 부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곁에 없어 느끼..
저 숲을 이룬 아파트들 손보다 높이 올라간 서가들 창마다 불이 켜진 무덤들 어차피 다 읽어 볼 수도 없는 색인표 하나씩 둘러쓴 잃어버린 왕조의 유물들 내 살아온 얘기 책으로 쓰면 소설책 열 권도 모자라지 월세 올리러 온 노인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퀴퀴한 침묵이 내리누르는 망자들의 열람실에서 눈에 불을 켜고 무덤을 뒤지는 도굴범들 빌릴 수는 있어도 가질 수는 없는 집들 은행이 말한다 당신은 연체 중입니다 대출 금지입니다 전윤호(1964~) 시인은 ‘서울에서 20년’이란 시에서 아파트를 무덤에 비유했다. 무덤과 무덤이 마주 보고 있어 서로 불편하고, “당신의 눈 속엔 관이 안치”돼 있다고 했다. 하긴 ‘영끌’해 아파트를 샀는데, 금리마저 치솟고 있으니 “우리는 이미 반쯤 죽”은 게 맞다. 이 시에서도 ..
꽃을 솎는 일은 나무에게서 나비를 빼앗는 일 이유 없이 헤어진다 한 꽃이 다른 꽃들과 비바람과 벌레와 새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어줌으로 농부의 곁을 지켜주는 과일을 먹는다 파치의 시간으로 잠들고 깨어나는 나는 가슴에 몇백 개의 꿈을 더 가졌다 나는 갖가지 영혼의 양초를 파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상한 과일들이 빌려준 시간 속으로 성한 과일들이 들어온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인 그림자 속으로 달콤한 햇빛 한 줌 기울어온다 조현정(1971~) 약간 벌레 먹은 것이나 비바람에 떨어져 멍이 든 복숭아를 싸게 사 먹은 적 있다. 파치 중에서 그나마 성한 걸 골라 팔고, 상태가 안 좋은 것들은 버려졌을 것이다. 배달된 복숭아를 칼로 도려내며 먹다 보니, 정품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농부는 온전한 과일을 생산하기..
나를 한 장 넘겼더니 살은 다 발라 먹고 뼈만 남은 날이었다 당신이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나의 마지막 외침을 흔들어 버리면 새가 떨어진 침묵을 쪼아 올리는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텅 빈 하늘 아래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는 누구인가 깊고 깊어서 부스러기도 없이 뼈만 앙상하게 만져지는 기억들 미처 사랑해 주지 못했던 사랑처럼 남겨진 몇 개는 그냥 두기로 했다 오래된 노래처럼 내 귓속에서 흥얼거리며 살도록 이영옥(1960~ ) 11월 달력을 떼어내자 12월 한 장만 남는다. 벽에 걸 때만 해도 곳간에 그득한 양식 같던 한 해가 어느새 다 지나갔다는 회한에 젖는다. 회한은 반성과 자책으로 이어진다. 연초에 세운 목표는 달성했는지, 잘못한 거나 아쉬웠던 건 없는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11월은 거울 앞에 선..
복사꽃 아래 서면 문득 내가 비참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한 사나흘 푹 잠들고 싶어질 때가 있다 몽중에 누굴 호명할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고단한 한 생을 만나 서로 꽃잎 먹여주며 몹시 취해서 또 한 사나흘 푹 잠들고 나면,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고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은 그래서 아슴한 저녁나절 밖으로 나올 때는 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처럼 멍한 나를 발견했으면 한다 복사꽃 아래 새들 머문 적 없으니, 언제쯤 헛것에 끌려가지 않고 언제쯤 그물에 떨어지지 않고 아름다운 이 색계(色界), 무사히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박노식(1962~) 시인은 왜 “복사꽃 아래 서면” 초라해지기보다 비참해진다고 했을까. 참혹이나 참담, 처절과 비슷한 말인 비참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몹시 ..
어제와는 또 달라졌어 입동 하루 전에 찬비가 내리고 두꺼운 옷을 내 입고 강을 건널 때 어제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 끝까지 가야만 처음에 도달한다는 거 분명 어제와는 달라졌어 몸서리쳐지는 도약 아니면 추락일지도 모르지 두려움일까 아픈 기쁨일까 오늘은 어지러운 모습으로 달라졌어 써지지 않던 시가 급습할 것만 같지 이게 다 사랑의 힘인 것도 같고 지금껏 자초한 일들의 숨가쁜 업보인 것도 같고 하지만 더 아파도 좋다는 고독이 찾아왔다는 느낌에 나는 강을 건너고 눈앞은 여전히 황야야 별들이 가득 울고 있는 전율이야 황규관(1968~) 상강과 소설 사이의 입동은 겨울의 시작이다. 겨울나기를 위해 인간은 서둘러 김장을 하고, 산짐승은 굴을 파고 들어간다. 입동 당일에 날씨가 추우면 그해 겨울은 몹시 춥다고 ..
사랑하는 너를 데리고 갈 데가 결혼 말고는 없었을까 타오르는 불을 지붕 아래 가두어야 했을까 반복과 상투가 이끼처럼 자라는 사각의 상자 야생의 싱싱한 포효 날마다 자라는 빛나는 털을 다듬어 애완동물처럼 리본을 매달아야 했을까 침대 말고 아이 말고 내 사랑, 장미의 혀 관습이나 서류 말고 아찔한 절벽 흘러내리는 모래 모래 모래시계 미치게 짧아 어지러운 피와 살 무성한 야자수 하늘 향해 두 손 들고 서 있는 모래 모래 모래사막 독수리의 이글거리는 눈망울을 사랑하는 너를 문정희(1947~) 진학, 취업, 결혼 등 인생의 분기점이 있다. 진학이나 취업이 혼자 이뤄야 한다면, 결혼은 상대가 있어야 가능하다. 결혼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 사람의 결합이 아닌 집안과 집안, 문화와 문화의 만남이다. 확장된 관계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