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회학자 이철승의 를 읽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이사 가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미국인들은 가족 몇이서 천천히 며칠 동안 이사를 가지만, 유학생들은 협업을 통해 이사를 일거에 진행한다. 이사하는 학생이 미리 이삿짐을 포장해 놓으면, 이사 당일에 유학생들이 몰려와 짐을 컨베이어 벨트처럼 옮겨가며 순식간에 차량에 싣는다. 이사 가는 학생은 간단한 배달음식 등으로 동료들을 대접한다. 다음번에 누군가 이사 갈 때 일손을 보태야 하는 것도 일종의 ‘국룰’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인 유학생들의 ‘이사 풍습’을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본다고 한다. 전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말이 회자된 지 한 세대가 지났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세계가 변화하는 흐름을 지체되지 않고 함께 체험..
2021학년도 대학입학 정시모집 합격자 발표와 등록이 한창이다. 지방대의 위기가 담론이 아닌 현실이 됐다. 서울에 입지한 명문대들과 몇 개의 과학기술원을 제외하면 지방 사립대는 물론 지방 거점 대학도 전체 경쟁률 3 대 1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수험생들이 정시에서 지원하는 학교가 가, 나, 다군 3군데라는 것을 감안하면 경쟁률 3 대 1이 되지 않으면 어떤 지원 단위든 미달될 가능성이 있다. 입시 게임의 배치표에서 가장 아랫단에 위치한 지방 사립대들은 장학금 지급으로 열세를 만회해 보려는 중이다. 어떤 대학교는 일시금 100만원, 다른 대학교는 몇 학기 등록금 면제. 어느 재단이 더 재정 여력과 의지가 있는지를 정시 합격 신입생 장학금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적어도 10년 전부터 교육현장,..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 학생운동이 미미하게 남아 있었다. 학생운동은 대학생 중 숫자로도 정치적으로도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나마 힘을 발휘했던 건 치솟는 등록금 문제 덕이었다. 학교마다 ‘등록금 투쟁’ 혹은 ‘학원 자주화 투쟁’이라는 이름을 붙인 형태의 집회들이 있었다. OT를 통해 운동권 선배들과 친하게 된 새내기 중 몇몇은 학교 본관에 가서 연좌투쟁을 했다. 어설픈 민중가요와 춤, 구호들이 학생들 사이에서 오갔다. 등록금 투쟁을 승리하면 납부했던 등록금의 일부를 학생들에게 돌려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학교 행정조직은 1980년대 이후 학생들을 다루는 노하우를 익혔고, 학생운동은 뉴스거리가 아니었으며, 늘어난 대학의 숫자만큼 대학생이 함께 늘었다. 정치적 주체로서 학생운..
‘뉴노멀’이라는 말이 회자된 지 오래다. 원래는 저성장, 저금리, 저물가 상황을 뜻하는 경제 용어였다. 이제 뉴노멀은 팬데믹 위기가 만드는 변화를 칭하는 말로 확장됐다. 위기라는 낱말에는 위협과 기회라는 두 가지 뜻이 숨어 있다.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통해 국가와 사회의 역량을 파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 해결의 주체는 명확한가, 얼마나 기민하게 문제를 진단하고 대응하는가, 얼마나 인력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가. 코로나19 대응은 한국이 갖고 있는 역량의 강점과 약점 모두를 보여주는 거울 같다. 정부는 질병관리청과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고, 사스와 메르스 대응에서 빛을 발한 광범위한 검사→추적→치료 및 격리라는 3T 메커니즘을 수행하자는..
신입생 입학률, 재학생 충원율, 졸업생 취업률. 교육부가 대학에 요구하는 핵심 지표들이고 수도권에서 멀어질수록, 국립대보다는 사립대가 더 챙기는 지표다. 입학 최종 합격자 중 몇 명이 등록했는지가 입학률, 전체 재학생 정원 중 몇 명이 등록했는지가 재학생 충원율, 전체 졸업생 중 진학자나 입대자를 제외한 사람을 분모로 하고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회사에 들어간 사람을 분자로 해서 계산하는 것이 취업률이다. 기본은 신입생·재학생. 올해도 입학처의 비장한 당부와 함께 신입학 전형을 진행했다. 인구 절벽에 코로나19로 인한 교육의 질 저하로 지원자가 급격히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교수들은 입학 면접 때 우수한 학생을 뽑으면서도 내심 나가지 않을 것 같은 학생이 누구일까 타진해본다. 전형이 끝나고 나면 교수가 직..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질의가 회자됐다. 류 의원은 2018년 김용균씨가 숨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올해 9월11일 화물차 운전기사 사망사고가 또다시 발생한 것을 통해 발전소와 배전 노동자들의 현장 안전문제를 물었다. 김용균씨와 같은 작업복을 입고 안전에 대한 감수성 부재를 질타하는 그의 목소리가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기업 책임을 강화하고 보호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입법이 진행 중이다. 정의당은 21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중대한 인명 피해를 주는 산업재해를 일으킨 사업주와 기업의 처벌을 강화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6월 발의했고, 입법 촉구를 위해 한 달 넘게 1인 시위를 진행 중이다. 지난 1월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 예방 책임주체를 사업주..
비대면 강의로만 진행된 한 학기를 마치고, 새로 시작된 2학기. 제한적이나마 대면 수업을 할 수 있게 됐다. 3년 동안 강의했던 경험을 생각해보건대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자신도 있었다. 2020학번 1학년 첫 대면 강의를 하러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소위 ‘멘붕’이 왔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멀뚱멀뚱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처음 본 친구에게 비말이 튈까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출석을 부르며, 침묵 속에서 학생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데도 등허리에 땀이 흘렀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지침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강의를 시작했다. 질문에 대답하고 대화에 응하는 몇 명의 학생을 확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뭔가를 써보라는 과업을 주고 학생들을 ..
코로나19 확진자가 연일 세 자릿수를 기록 중이다. 대유행이다. 방역당국은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를 2.5단계로 상향조정했다. 전공의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의대생들은 의사국가고시를 거부한다고 선언했고, 대한의사협회는 3차 총파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정부는 협상을 요구함과 동시에 업무복귀명령을 내렸다. 고소득 전문직의 파업이라는 점에서 여론의 지지를 받기는 쉽지 않다. 여러모로 아슬아슬하다. 의료계와 정부가 갈등을 빚은 주요 원인은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 확대 문제다. 그리고 그 핵심 주제에 지방의 의료 문제가 있다. 정부는 지방의 필수과(내과, 일반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흉부외과, 응급의학과 등) 인력 부족을 근거로 정책을 펼치려 하고, 의료계는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 확대만으로 지방의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