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한 주 주말마다,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커다란 마음의 파도를 넘고 있다. 내게는 그사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몇 주 동안의 기억이 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멀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침대 옆에는 인공호흡기가 있었고, 혈압과 맥박 따위가 나오는 손바닥만 한 모니터가 머리맡에 있었다. 꼼짝하지 못한 채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눈도 뜨지 못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뇌출혈이었다. 아직 예순이 되지 않은 나이였으니, 아무도 마음의 준비가 없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지병으로 두통을 달고 지냈다. 최고로 꼽힌다는 병원을 찾아다녔고, 온갖 정밀검사를 했으나 의사는 한결같이 ‘이상 없음’이라는 결과를 통보했다. 극심한 통증으로 몇 달을 입원해야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알 수..
‘간첩이 틀림없어. 평일 아침에 흙 묻은 등산화를 신고, 허름한 배낭을 멨다. 게다가 버스비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분명 간첩이야. 저걸 어떻게 신고하지? 가다가 파출소 앞에 차를 세워야겠다.’ 1970년대가 아니었다. 1987년 민주화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86년이었다. 나는 초등학생도 아니었다. 군대까지 다녀온 스물아홉 먹은 멀쩡한(?) 청년, 게다가 버스 운전사였다. 그런데 아침에 내가 모는 삼화교통 333번 버스에, 어릴 적 반공 세뇌 교육으로 배운 그런 간첩 행색의 남자가 탔다. 나는 룸미러로 그자를 훔쳐보면서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파출소에 버스를 대고 얼른 뛰어가 신고했다. 그런데 경찰이 와서 조사해 보니 간첩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었다. 부끄러웠다. 이렇게 부끄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요..
시민의회,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면서 이 용어에 대해 촛불 현장에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문제가 된 단어는 ‘권력’이었다. 권력이 시민의 손에 있다고 하면 괜찮을까. 우리는 둘 다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를 했다. 대중의 환호를 받고 등장한 권력이 대중의 원망을 사고 몰락해간 역사는 많다. 이는 ‘선한 권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권력 자체의 속성이 스스로를 강화하고 지배권역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권력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권력을 쥐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야 한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보면서도 권력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덧없음에 대권행보를 중지하고 물러나는 대권주자는 아직 없다. 권력의 흡인력은 무지막지해 보인다. 이전 권력의 비참한 말로가 뻔히 보..
어느 낮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한 낱말을 되뇌었다. 모르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 들은 말인 양 계속 중얼거렸다. 머금다, 머금고, 머금으며…. 그러다 그만 턱이 진 길에서 발을 헛디뎠다. 등에 배낭을 멘 채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두 무릎이 얼얼했다. 2014년 4월16일에 딸을 잃은 엄마로부터 “우리는 머금고 사는데…”라는 말을 듣고 헤어진 뒤였다. 그 말이 그렇게 힘들고 아픈 말일 줄 몰랐다. 그이는 ‘빈자리’도 말했다. 딸과 아들, 부부, 해서 늘 네 자리였다. 집에서 마주앉는 식탁에서도, 외식을 할 때도 네 자리. 그러나 그날 이후 다시는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생겼다. 빈자리는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자리, 딸 자리, 누나 자리,..
큰아이가 다니고 있는, 면사무소 옆 초등학교에는 딸린 논이 있다.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이 두 도가리(배미). 서로 다른 마을에 있다. 학교에서는 제법 떨어져 있어서 어느 쪽이든 아이들 걸음으로 가자면 한 시간은 걸린다. 초등학교 재산 목록에 논이라니. “요즘이야 학교에 보탠다고 하면 장학금이니 지원금이니 돈으로 내지만, 예전에는 좀 여유있게 사는 집에서 땅을 내놓고는 했어요. 그러면 그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해마다 학교 살림을 살았지요.” 그렇게 해서 학교 땅이 된 논밭이 아직 남아 있기도 하다는 것. 이제는 농사지어서 거둘 수 있는 돈이라는 게 아주 형편없거니와, 땅을 빌려준다고 해도 마땅히 부쳐서 농사지을 사람도 없어서 아예 땅을 처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마을에서 그런 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
“박근혜는 하야하라.” 서울 도심에서만 100만여명!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월드컵 때도,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도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 비폭력으로 평화롭게 진행한 집회였다. 짱돌과 최루탄과 쇠몽둥이가 난무하던 1980년대 집회 광경이 생각난다. 나는 그때 서울에서 333번 시내버스 운전 일을 하고 있었다. 거리엔 늘 데모대와 경찰이 대치했다. 내가 봤던 경험으로만 보면 데모가 가장 심했던 때는 1987년 6월이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체육관에서 간접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4·13 호헌조치’를 선언한 뒤, 각지에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고 6·10항쟁으로 이어졌다. 시민과 학생들은 백골단에 몽둥이로 맞아 머리가 터지고 피를 흘려도 항거를 멈추지 않았다. 전국..
나흘 만에 돌아온 집과 농장은 참 고요했다. 가을색은 더 깊어져 있어서 곱게 늙어가는 귀인처럼 애잔해 보였다. 서울에서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12일 밤 11시쯤 광화문광장 주무대에서 진행된 ‘시민자유발언’ 시간이었다. 전혀 가공되지 않은 생목소리들에 나는 압도당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것으로 보이는 여성 연극인이 무대에 섰다. 주어진 3분 동안에 쏟아낼 말들은 너무 많았고 쌓인 울분은 산을 이루었다. 작품과 공연이 거부되었던 그 예술인의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은 얼굴 전체를 큰 눈물덩어리로 보이게 했다. 예술인들의 자유혼을 짓누르고 고통을 기획한 당사자들을 지목했다. 조윤선 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직접 거명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동자가 올랐다.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보였..
이즈음 아침, 늘 다니던 등굣길이 아니라 조금은 낯선 출근길에 마음 바쁠 네게 편지를 쓴다. 어느새 고3이 되었나 싶었는데 벌써 그 시간 끝자락에 섰구나. 얼마 전 네가 전화로 취업 소식을 전했지. 몇 차례 면접을 본 뒤라 전화기 저편 목소리가 밝더구나. 내 휴대전화기에 뜨는 네 이름 뒤에는 ‘○○중3’이 덧붙어 있어. 네가 중3이었을 때 처음 만난 게지. 이제 더는 중학생이 아니니 지워야지 생각하면서도 편집 단추를 누르고 삭제 단추를 누르는 일을 자꾸 미룬다. 지난해 봄, 우연히 너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신 날이 있었지. 식당을 향해 나란히 걷는 길에서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도 너는 내 옆에서, 내 앞에서 뭔가 혼자 계속 망설이더구나. 무척 말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절대 말하기 싫은 마음이 입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