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겨울이 몹시 추웠다. 빨간 내복 위에 털실로 짠 바지를 껴입고 눈 쌓인 골목을 휩쓸고 다니다 보면 바지 밑단에 얼음이 엉겨 붙어 뻣뻣해졌다. 그때 골목길은 대개 흙바닥이라서 겨우내 꽝꽝 얼어붙었다가 날이 좀 풀린다 싶으면 쌓여 있던 눈과 함께 녹아 곤죽이 되곤 했다. 이제 집 밖으로 나서면 시멘트 바닥에 아스팔트가 짱짱하게 깔려 있어 실감하지 못하지만, 땅도 겨울에는 강물처럼 얼었다 녹기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리밭은 이른 봄이면 겨우내 들뜬 겉흙을 눌러주고, 보리가 뿌리를 잘 내리도록 보리밟기를 한다. 밟아줘야 잘 자라며, 웃자라지 않도록 제때 밟아야 하는 것은 보리의 생장이다. 대학에 들어간 뒤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번 청년은 얼마 전 꽤 좋은 학원 강사 자리를 얻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립도서관 앞 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했다. 대로변에 야자나무가 늘어선 LA를 가로질러 닿은 글렌데일은 조용한 도시였다. 특히 도서관 앞 공원은 한적했다. 노인 둘이 나무 그늘에 앉아 두런거렸고, 그들 뒤로 주먹을 단단히 쥔 소녀가 앞을 응시한 채 꼿꼿이 앉아 있었다. 글렌데일시는 2007년 7월30일 미국 하원이 만장일치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을 기념해 매년 7월30일을 ‘위안부의 날’로 지정했으며, 2013년에는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이곳에 소녀상이 설 수 있었던 것은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려는 활동가들의 노력도 주요했겠지만, 무엇보다 시민들의 지지 덕분이라고 했다. 글렌데일 시민의 40%가 넘는 아르메니아계 시민들이 과거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에..
이른 봄날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가워서 새벽 기차에 오른 사람들은 대개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다. 맨 처음 그들이 눈에 띈 것은 옷차림 때문이었다. 똑같이 짧은 치마에 몸에 꽉 끼는 재킷을 입은 그들은 하얀 패딩을 겉에 걸치긴 했지만 추워 보였다. 범상치 않은 옷차림에 곱게 화장한 앳된 여자 여섯 명이 기차 안 좁은 통로에 줄지어 들어서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공연하러 가나? 아이돌인 건가? 텔레비전만 켜면 나오는 게 아이돌인데, 그들의 얼굴은 낯설어서 사람들의 호기심은 금방 수그러들었다. 그들은 조용했고, 기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곧 그들을 잊었다. 그들은 기차 종착역인 남쪽 해안 도시에서 내려 기차역을 빠져나가는 인파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들을 해 질 녘 서울로 가..
어릴 적 내가 살던 면소재지에는 주말이면 유황 온천물에 몸을 담그려고 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기차역이 있었고, 기차역 앞에는 우체국과 전신전화국이 같이 쓰는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은 기차역사보다도 크고 번듯했지만, 전신전화국으로 쓰이는 방은 옹색했다. 그 방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은 고작 두 명이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교환대 앞에 앉아 전화선을 연결해줬다. 동네마다 전화기를 놓은 집이 몇 되지 않던 때라 전화번호부가 A3 사이즈 종이 한 장으로 충분했지만, 시골 사람들은 그 간단한 전화번호부조차 들여다보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수화기를 들고 교환원과 연결되면 전화번호를 말하지 않고 대뜸 신언리 박 아무개라든지 장터 고무신 가게라든지 통화하고 싶은 이의 이름을 댔다. 때로는 이름이 가물가물해서 그 집이 ..
우연히 여고생들이 독후감을 발표하는 자리에 있었다. 학생들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나온 학생은 성추행당한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은 뒤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자로 살면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흔히 겪잖아요. 그런데 다들 그런 일이 여자 탓인 것처럼 말해요. 짧은 치마 입지 마라, 늦게 다니지 마라.” 그의 말에 스무 명 남짓 되는 아이들이 대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그들의 할머니가, 어머니가, 언니가 감내한 일이었으니까. 나 또한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나는 딸에게 쉽게 말했다. 네 몸가짐을 잘하라고. “그런데 그건 엘리베이터 안에서 배달되는 치킨 냄새가 좋아서 덥석 집어먹고는 치킨 탓..
서울 황학동 도깨비시장을 돌아다니다가 헌책을 부려놓은 곳에서 누렇게 빛바랜 일기장을 찾아냈다. 1977년에 발간된 한 어린이 잡지의 2월호 특별 부록인 ‘학습일기장’에는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가 빼곡했다. 겉표지는 떨어져 나가고, 떡제본 된 책등은 벌어져 나달대는 일기장이 어떻게 세상을 돌고 돌아 헌책 사이에 버젓이 끼어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본래 이런 일기장의 숙명은 땅속에 파묻는 김장김치처럼 책상 서랍에서 묵혀졌다가 골마지 낀 묵은 김치 퍼버리듯 버려져 어느 고물상 한 구석에서 불리고 갈아져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아이는 어린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왕년의 삶은 꽤 괜찮았다고 믿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쪼그리고 앉아 건성으로 일기장을 들춰 보자 어디선가 달려온 가게 주인이 일기장 값을 ..
내 만화의 계보는 쾨쾨한 냄새가 밴 동네 만홧가게에서 시작된다. 서로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아이들은 좁은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연신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겼다. 해 질 녘이면 아이들은 하나둘 빠져나가고, 남은 아이들 중 몇은 어머니한테 붙들려갔다. 나는 그 만홧가게에서 독고탁과 비둘기 합창을 뗐으며 숱한 순정만화들을 봤다. 그 시절 순정만화를 많이 본 여자아이들은 으레 공책 표지 뒷면에 간장종지처럼 큰 눈에 다이아몬드 같은 게 박힌 여자를 그리곤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은 온종일 눈 큰 여자를 그려냈다. 부지런히 손만 움직일 뿐 좀처럼 말을 하지 않던 그 아이는 나중에 만화가가 될 거라고 수줍게 말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만화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만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그는 한국전쟁 때 혈혈단신 남으로 내려와 피붙이 한 명 없는 땅에서 팔십 평생을 꿋꿋하게 살아왔다. 결혼하고 나서 세운 공장이 꽤 잘 되어서 자식들 남부러울 것 없이 먹이고 입혔다. 부인은 다락방에 네 딸 결혼시킬 때 싸줄 그릇이며 냄비를 착실하게 모았다. 혼자 부초처럼 떠돌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출세한 거였다. 그래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암에 걸린 부인은 다락방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그릇과 결혼하지 않은 딸들을 남겨놓은 채 세상을 떴다. 그는 아무런 꿈 없이 공장과 집을 오갔다. 그는 변하지 않는데, 하던 일도 그대로인데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머리 굵은 자식들은 그가 말만 꺼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퉁바리를 줬다. 그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이 다른 것 같았다. 아이들이 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