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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데이트 폭력’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고발되었다. SNS상에서 폭로와 사과가 연이어 오고 가며 여기저기 기사화도 되었다. ‘데이트 폭력’이란 ‘연인 사이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하는데, 가정폭력과 마찬가지로 은폐되고 드러나지 않는다. 이번에 SNS에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여성도 수년이 지나 어렵게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 문제를 공개하느냐는 문제제기도 있다(금태섭 변호사가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데이트 폭력 피해자에 대한 훈계, 그 무지에 대하여’라는 글 참조).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데이트 폭력에 분노하는 많은 이들이 ‘왜 맞으면서까지 상대방을 만날까’라는 의문을 버리지 못한다.

데이트 폭력이 어떻게 한 여성을 파괴하고 그의 주체적 결정을 가로막는가를 잘 설명해주는 만화가 있다. 스웨덴 여성 만화가 오사 게렌발의 <7층>(우리나비)이다. 표지를 보자. 맨 위에 분노한 남자 주인공 닐의 얼굴이 있고, 그 밑으로 점점 작아지는 여자 주인공 오사의 얼굴이 있다. 폭력이 상대방을 어떻게 무기력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상징적 표지다.

오사 게렌발의 <7층> (출처 : 경향DB)


항상 검은 옷을 입고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리는 오사는 새로운 예술학교에 다니게 된다. 이곳은 예전에 다니던 학교와 딴판으로 모든 게 쿨했다. 오사는 이 학교가 퍽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파티에서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학교 최고 인기남 닐이 오사에게 다가왔다. 교수부터 학생들, 그리고 아주머니들까지 모두에게 인기 최고인 닐은 오사에게 “넌 내가 지금껏 알았던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답고 멋진 여자야. 겉모습만큼 마음도 분명 예쁘겠지. 밝고 명랑한 데다 똑똑하기까지 하고. 정말 사랑해”라고 고백한다. 오사는 행복했다.

‘달콤하고 행복한 꿈’은 곧 ‘악몽’으로 변한다. 닐은 오사의 작은 행동을 꼬투리 잡아 화를 내고 윽박지른다. 오사는 닐이 왜 화를 내는지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닐에게 사과한다. 사과하는 오사에게 닐은 뭘 잘못했느냐고 윽박지른다. 닐은 점점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오사는 모든 걸 닐에게 맞춘다. 귀고리를 빼고, 머리를 염색하지 않게 되었으며, 화장을 그만두고, 즐겨 입던 검은색 옷을 버렸다. 오사는 오사다운 개성이 점점 사라지고, 닐이 제시한 틀에 맞춰진 오사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둘을 완벽한 커플로 봤다. 언어폭력으로 오사를 틀 안에 가두던 닐은 서서히 신체적 폭력도 가하기 시작했다. 때리고 목을 졸랐다. 심지어 자동차로 데려가 운전을 시킨 뒤 괴롭혔다.

아무도 모르게. 오사는 닐과 함께 사는 7층에서 늘 뛰어내려버릴까 하고 생각한다. 닐의 폭력은 갈수록 과격해진다. 어느 날, 닐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오사의 손을 물어버린다. 살점이 뜯긴 손을 본 오사는 차를 타고 아빠에게 돌아가 상처를 보여준다. 그 뒤 주변 사람들과 제도의 도움을 통해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발급받고, 닐을 고소한다.

“난 그야말로 난파선과도 같았다. 내 자존심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사는 닐이 망가뜨린 CD를 다시 사고,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며, 검정 옷을 사고, 화장을 시작했다. 이렇게 노력해도 한 번 망가진 자존감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직업도 갖고, 친구들과 만나도 “거대한 짐덩이”가 오사를 따라다녔고,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시금” 오사를 파괴했다. 폭력은 마치 개미지옥과도 같다. 한 번 빠지면 몸과 마음이 모두 파괴되면서 계속 함정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스스로 빠져나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사도 혼자 고립되었다고 생각하고, 7층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많은 여성들이 7층에 서 있다. 가부장적 편견이 유독 강한 우리나라는 특히 7층에 서 있는 여성들이 많다. 7층에 서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건 우리의 몫이다.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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