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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갑의 역습

opinionX 2018. 5. 2. 11:10

나는 한동안 모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일했다. 의원의 바쁜 일정은 한동안 계속됐다. 어느 이른 봄, 토요일. 그날은 수행비서의 감기몸살로 내가 대신 운전대를 잡았다. 아침부터 경기도 부천·구리·안양·안산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초행길이라 내비게이션을 켰지만 길을 잘못 들어서길 수차례, 계획한 시간이 조금씩 늦어졌다. 의원은 괜찮다고 위로했다. 주차할 땐 차에서 내려 뒤를 봐준다. 해가 질 무렵 수원에서 행사가 시작됐다. 의원은 늦게 끝날 것 같으니, 차키를 자신에게 주고 그냥 가라고 했다. 행사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고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일정을 모두 마치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의원과 나는 일상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한참을 대화하다 의원은 내가 오늘 저녁 약속이 있는데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원은 차를 갓길 옆으로 붙이라고 했다. 나는 차를 세웠다. 의원은 뒷좌석 문을 열어둔 채 밖으로 나왔다. 나도 나오란다. 의원이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의원이 열어둔 뒷좌석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앉았다. 차가 잘 달렸다. 나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확인했다. 의원은 자신이 젊었을 때 채소가게 하면서 트럭을 운전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는 난감했다. 어디까지 이러고 가야 하나…. 결국 의원은 약속 장소까지 나를 모셔다(?) 주었고 술도 함께 마셨다. 술값. 의원이 냈다. 1차 술자리가 마무리됐고 의원은 대리운전을 불러 집으로 갔다.

의원과 전라남도 진도군으로 출장을 왔다. 그곳은 외지기도 했지만, 갑자기 온 터라 숙박할 곳을 예약하지 못했다. 일정을 마치고 간 곳은 하룻밤 3만원짜리 시골 모텔이었다. 방 두 개를 잡을 법도 한데 의원은 하나만 잡는다. 곰팡내 나는 좁은 방 그리고 침대 하나. 두 남자가 늦은 밤에 할 일이 뭐 있겠는가. 편의점에서 사 온 캔 맥주를 하나씩 마셨다. 나보고 먼저 씻으란다. 아니나 다를까. 의원은 내가 씻고 있는 동안, 침대와 텔레비전 사이 비좁은 바닥에 자신이 누울 자리를 골라놓고 이불까지 깔았다. 결국 나는 침대에서 잤다. 잘 잤다. 의원이 침대가 불편해서 그런 것인지, 혹시 집에 침대가 없는 것인지 궁금했다.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봤다. 댁에 침대가 있단다. 하기야 침대를 안 써도 비좁고 냄새나는 바닥에서 자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의원은 어려서부터 그의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공동체에서 전쟁고아, 동네 부랑아들과 먹고 자며 함께 자랐다.

갑질. 대기업 회장 부인이 임신 중인 직원을 30분간 비를 맞고 서 있게 했단다. 그녀의 자녀들도 회사 직원들에게 수시로 폭언과 행패를 일삼았단다. 이러한 행태가 여기서 끝나겠는가. 그 대기업 사주 일가는 사익 편취 등 비리 의혹이 도마에 올라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소개한 5선 국회의원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기업 창업주다.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 회사 지분 전부를 사회에 환원했다. 개털이 된 의원은 자기 소유 집 한 채 없는 전세살이였다. 한번은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해서 의원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야 자신의 집이 생겼다.

한때 의원이 소유한 차량의 주행거리는 45만㎞였다. 그것도 추정치. 45만㎞에서 계측기가 멈추고도 수개월을 더 탔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가 38만㎞. 보통 영업용 택시는 30만㎞, 자가용 승용차는 20만㎞ 전후에 폐차한다. 지금은 장기임대로 새 차를 타고 다닌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거기엔 그의 아버님이 그에게 가르치시던 글귀가 적혀 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수업료 한 푼 안 내고 월급 받아가며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다. 의원은 아침 일찍 신문을 읽는다. 이 글도 보시겠지. 한마디 할 것이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혼날 게 뻔하다. 당분간 전화 드리지 말아야겠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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