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07년 1월 영국에서는 토니 블레어 총리가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그가 당수로 있던 시절 총선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비밀 대출을 받았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1998년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인턴 여직원과의 성추문 의혹으로 특별검사의 수사를 받았다. 유럽 국가에선 교통법규를 어긴 국회의원이나 판사가 경찰에 단속당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보도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법 앞의 평등’ 원칙이란 것을 확인해 주는 사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권력, 명예 등 모든 가치가 불평등하게 나뉘고 계층 간 벽을 뛰어넘기 어렵지만, ‘법’만큼은 신분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상식이 대다수 서민과 사회적 약자들의 체제 순응을 담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 국가에서 경찰과 법에 대한 신뢰와 권위는 철저하게 지켜진다. 대통령이나 총리, 국회의원이 물러나면 다시 선출하면 된다. 하지만 경찰과 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추락하면 사회 통합과 응집력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최고위 경찰 간부인 서울경찰청장이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며 증거를 조작하고 허위 발표를 한 혐의로 기소된 것도 모자라 경찰청 국장급 간부가 식사자리에서 여당 국회의원에게 폭행당했다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된 뒤 진실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정확한 사실은 당사자와 현장 참석자들만 알 수 있는 상황에서 보도 매체에 따라, 그리고 여야에 따라 말이 다르다.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와는 별개로, 언론이나 국민 여론이 ‘여당 국회의원과 경찰 최고위 간부 사이가 갑을 관계이며 폭행이 발생할 수 있는 분위기’라고 믿는 상황 자체가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굴곡과 함께해 온 대한민국 경찰은 그동안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과거의 오명을 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특히,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자랑스러운 ‘민중의 지팡이’가 된 신세대 경찰관들의 자부심과 사명감은 세계 어느 경찰 못지않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과거사 때문에, 그리고 고위 경찰 간부들의 정치적 줄타기 의혹 사건 때문에 거리에서 시민들로부터 불신받고 저항당하는 치욕을 겪으면서 사기가 꺾이고 있다.
얘기하는 김태환 의원 (경향DB)
법규 위반이나 단속 현장에서 ‘왜 나만’ ‘힘센 나쁜 놈들한테는 꼼짝 못하면서’라는 흥분한 시민의 볼멘소리 앞에서 이를 악물 뿐이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진실을 추구하며 어떤 불법과도 타협하지 않는…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오직 양심에 따라 법을 집행하는 의로운 경찰이다”라는 경찰헌장 내용이 입안에서 맴돌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슈퍼갑의 횡포’가 실제로 발생하고 허용된다면 비단 경찰의 권위와 자존심을 짓밟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웃 사람들이 차례로 유태인, 동성애자, 정신질환자,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나치 게슈타포에게 잡혀가자 ‘나는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던 독일인 역시 ‘이웃에 유태인이 사는데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잡혀가게 되자 불의에 침묵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됐다는 일화가 있다.
정의가 무너지고 불의가 판치면 언젠가는, 다음번에는 나와 내 가족 혹은 자손이 부당하고 억울한 ‘갑의 횡포’ 앞에 무너질 수 있다는 자각이 필요한 때다. 해당 국회의원 개인의 문제가 아닌, 권력을 틀어쥔 극소수의 ‘슈퍼갑’은 경찰의 뺨을 때리고 헌법을 유린하고 법과 제도를 짓밟고 있다고 언론과 일부 국민이 믿고 있는 ‘망국적 법치 붕괴’의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권력이나 돈을 가진 ‘사회적 갑’들의 이익보다 헌법과 법제도, 그리고 ‘사회정의 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표창원 | 범죄심리학자·프로파일러
'=====지난 칼럼===== > 표창원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킴 필비와 매카시, 이석기와 원세훈 (2) | 2013.09.04 |
---|---|
국정원과 ‘썩은 사과 장수’ (0) | 2013.08.16 |
국정원 사건 국정조사가 밝혀야 할 4가지 (0) | 2013.06.27 |
‘국정원 게이트’와 박 대통령이 해야 할 일 (0) | 2013.06.07 |
공직기강 확립으로 안되는 일 (0) | 2013.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