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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珉
옆에 선 여자아이에게 몰래, 아는 이름을 붙인다 깐깐해 보이는 스타킹을 신은 아이의 얼굴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긴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끝이 하얗고 가지런하다 버스가 기울 때마다 비스듬히 어깨에 닿곤 하는 기척을 이처럼 사랑해도 될는지 창밖은 때 이른 추위로 도무지 깜깜하고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다녀오는 것일까 그 애에게 붙여준 이름은 珉이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아득한 오후만 떠오르고 이름의 주인은 생각나지 않는다
- 유희경(1979~ )
△ 우연만큼 가연성이 강한 질서가 또 있을까. 막차시간 빽빽한 버스 안이어도 좋고, 낯선 곳에 홀로 여행을 와서 환기되는 어떤 흐느낌이어도 좋다. 옆에 선 여자아이를 가만히 관찰하다 버스 안에서 어깨가 쓸리고 부딪히고, 서로의 입김이 모르는 척 달라붙어 차창이 뿌옇게 달아오르기도 한다. 시인은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절대적인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개인이 앓는 외로움은 놀라운 친화력으로 타자를 오인하기도 하는데, 얼굴도 보지 못한 여자아이에게 일순간 사랑을 느끼고 이름을 붙여주고 기억을 하고 싶은 마음의 근거는, 자기가 느끼는 이 외로움의 통점을 스스로가 너무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결국에는 헤어진다. 사랑이라는 이 참혹한 감정은 이별을 종점에 두고 발발하는 화학작용이며, 그런 맥락에서 태어난다는 것 또한 죽음을 목적으로 한 사건일 뿐이다. 이렇듯 우리의 미래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열리고 시작되어서 오직 과거의 영향 때문에 종결된다.
민정, 민서, 민주, 민희…. 민(珉)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자리에 우연히 불러본 미지의 당신들을 생각하는 밤. 시인의 불행이 하나의 미학을 건설할 수 있는 토대라면, 나는 기꺼이 그 불행들을 사랑하겠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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