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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의 연보


한 번도 우리를 부숴본 적 없었다


명자나무는 스스로를 찔러 꽃을 피우고 아버지는 채찍처럼 이름을 휘둘러 나를 키웠다 이름은 상처와 같아서 소리 내어 부를 때마다 피가 흐른다


내 탓이 아니었다 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수리 나무 밑 어두운 우리, 머리 위에서는 내내 마른 잎사귀들이 울었다 내일은 없었다 그건 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과거의 한때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웃고 있다 내일은 어떨까 그것이 내 일이다


우리는 서로 밤마다 멀어졌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견디는 법 그러나 그것은 어제의 일, 이따금 바람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등을 후빈다 색깔 없는 구름들이 우리를 지키고 마른 잎사귀들이 우리를 덮고 우리는 흙이 되고 우리는 서로를 가두고 우리는 우리의 전부가 되고 우리는, 우리는 목 놓아 운다


뒤꿈치를 들자 가파른 자갈들이 굴러떨어진다 나는 오늘에서 어제를 지운다 그것이 내일이다 날마다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을 외운다 그것이 내 일이다 내일이었다 

- ‘하루의 연보’ 부분, 김선재(1971~ )



△ 스스로를 찔러 꽃을 피워야만 하는 꽃나무가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제 살을 찌르고, 찢어서 향기를 내야 한다니. 다치고 아프고 나서야만 가능해지는 ‘나’라니! 그렇다면 시인의 하루는 아마도 아픈 자리에서만 열리는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나’보다 ‘우리’라는 공동체가 열리고 있는 것은 과연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명자나무의 꽃이 피기까지, 그렇게 향내가 그윽해지기까지 시의 발화자는 잎사귀들이 울고 있는 지금-이곳을 견지하고 있다. 왜 우리에게는 아파야만 열릴 수 있는 내일이 있고, 우선 아파보라는 충고만 있는가. 때문에 우리는 견디는 주체여야만 하고, 싸워야 하는 주체여야만 했다. 생각하기 싫더라도 생각한다. 감각하기 싫어도 감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것이 질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일”이 왜 “내 일”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는 이곳을 견디기 위해서 내 일을 내일처럼, 내일을 내 일처럼 살아야만 했다.

김선재가 시인으로서 이곳을 “견디는 법”이 아직도 그리워진다. 그렇게 “슬퍼도 살아야 하는 것은”(<얼룩의 탄생> 뒤표지 글) 우리는 ‘어떤 것’을 피가 나도록 아직 더 불러 봐야 하기 때문이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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