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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견유주의자 디오게네스는 왕관을 쓴 왕을 허깨비 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렉산더 왕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걸 들어주겠다는 왕에게 그냥 비켜서라고 했다. 햇볕! 그는 원하는 것을 이미 누리고 있었다. 왕이란 기껏해야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존재가 아니던가. 왕궁과 군대를 빼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 왕관을 벗겨놓으면 왕이었다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는 존재가 누구를 구원한단 말인가. 왕관 하나를 차지하려고 온갖 음모를 꾸몄고 그걸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존재, 이미 그것으로 충분히 병든 존재가 누구를 치유한단 말인가. 그래서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를 ‘아틀리오스의 아들 아틀리오스’라고 불렀다. 아버지인 필리포스 왕이나 그 자식인 알렉산더나 똑같이 가련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왕에게는 왕관이 필요 없다. 이것이 견유주의의 가르침이다. 그 삶이 온전히 왕인데 별도의 표시가 왜 필요한가. 왕관은 오히려 가짜왕의 징표이다. 이와 반대로 인류사에는 넝마를 두르고도 왕이었던 사람들이 있다. 왕관을 벗어던졌으되 사람들이 법왕이라고 부르는 석가가 그렇고 왕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썼던 예수도 그렇다. 왕관도 없고 왕궁에도 살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왜 왕인가. 그것은 그들이 기꺼이 처했던 자리, 그들이 기꺼이 떠맡았던 일 때문이다.

허깨비 왕과 진정한 왕에 대한 디오게네스의 생각은 로마 시대의 스토아주의자 에픽테토스로 이어졌다. 그는 노예로 태어났으나 디오게네스만큼이나 권력자 앞에서 당당했던 사람이다. 왕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왕의 임무가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라면 왕이 어디에 있을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아픈 사람들이 있는 곳, 거기가 왕의 자리다. 그는 의사처럼 뛰어다니며 맥박도 재고 처방전도 써야 할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진정한 왕은 “왕이라기보다는 집사”라고도 했다. 왕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가정을 제 가정처럼 돌봐야 하고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로지 공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 진정한 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사람의 삶이다. 이것이 알렉산더 같은 이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디오게네스 같은 이들의 삶이다. 강연을 듣던 누군가 에픽테토스에게 물었다. “그럼 견유주의자는 정치를 안 하는 겁니까.” 에픽테토스가 답했다. “그대는 이미 어마어마한 정치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정치 참여를 묻는가. 그가 높은 직책에 앉을지 더 물어보라. 그러면 나는 말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아, 도대체 어떤 직책이 지금 그가 하는 일보다 더 높다는 것인가?’”

지난 금요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했다. 국민이 위임한 지위와 권한을 최순실 일당의 사적 이익을 돌보는 데 썼다는 이유였다. 정말, 그는 청와대를 사적인 집으로 만들었고, 가정과 자식은 없었으되 특정한 가정만을 제 가정처럼 돌봤다. 그러나 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했어야 하는 더 결정적 이유는 세월호 때 보인 행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대통령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에 거처한다는 것, 그것이 그가 대통령임을 보여주는 유일한 표식이었다. 그뿐이었다. 왕관만 썼을 뿐 허깨비였다. 그는 수장된 아이들을 두고서 발을 동동 구르던 유족들, 엉엉 울며 청와대를 찾아온 유족들을 길바닥에 내버려두었다.

대통령은 헌법 69조에 따라 취임선서를 한다. 자신이 수행해야 할 일들을 나열한 뒤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맹세한다. 직책은 이미 규정된 것이므로 대통령이 되려는 자가 맹세할 수 있는 것은 ‘성실히’라는 말뿐이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성실’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그 위반으로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직무의 ‘성실한’ 수행은 대통령을 대통령답게 만들어주는 맹세의 유일한 내용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으로는 대통령을 파면할 수 없는 셈이다. 그러나 어떻든 이것은 왕관을 벗기는 법적 선고의 문제일 뿐이다. 왕관을 써도 있어야 할 곳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왕은 왕이 아니다. 그는 왕관을 쓴 허깨비다. 세월호 사건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미 허깨비였다.

그렇다면 진정한 왕은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 제 일을 제쳐두고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길바닥으로 뛰쳐나온 사람들. 진정한 왕이 아니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 울고, 그 어깨 위에 모포를 덮어주며 따뜻한 차를 내온 사람들, 무엇보다 허깨비 왕을 끌어내기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 왕의 자리에 있었고 왕의 일을 한 사람들, 바로 그들이 왕관을 쓰지 않은 왕, 진정한 주권자가 아니었던가.

대선이 다가오니 성군이 되겠다며 청와대로 가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한때의 민주화 운동이 그들에게 높은 직책에 올라야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허깨비 왕에 대한 가르침에 유념하기 바란다. 그들이 타도한 독재자는 왕이 아닌데도 왕의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왕의 자리에 있지 않았고 왕의 일을 하지 않았기에 독재자였다. 독재자가 앉았던 그 자리에 뛰어들어 성군을 다짐하는 사람에게는 에픽테토스처럼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그 자리가 아니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고려대 민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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