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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감]아름다운 세상

opinionX 2016. 6. 8. 13:00

화가의 꿈을 꾸었던 중학생 시절, 같이 그림 그리던 친구들이랑 어디서 주워들은 “프로방스”란 곳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다. 프랑스란 나라가 세상 어디쯤 붙어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고흐’나 ‘피카소’ 등 세기의 대가들이 불멸의 작품들을 완성시켰던 곳이어서 그곳에 가면 저절로 그림이 잘 그려질 것 같은 환상에 갑론을박하기도 했고 어른이 되면 꼭 그곳에 가 보리라고 다짐하곤 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파리에는 두 번 정도 다녀왔지만 “어린 시절의 나”와의 약속으로 남아 있던 그곳, “남불” 쪽으로는 가볼 기회가 없었는데, 2년 전, ‘대상포진’이란 고약한 병치레를 한번 겪었더니 내가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 노인네 그냥 두면 영 가버릴 것 같았던지 열흘의 휴가를 주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코트 다 쥐르’ 해안을 뚜껑 여는 차를 하나 빌려서 낭만적으로 한번 달려보자고 했더니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냥 혼자 다녀오시라’고 하는 게 아닌가. 사실 아내는 날 따라가 봐야 별 재미가 없다는 걸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고 솔직히 나도 왠지 그곳은 혼자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녀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에 “언어 장벽”이란 막강한 부담을 지고도 오월, 푸르렀던 어느 날 프랑스행 비행기에 가볍게 몸을 실었다.

밤늦게 니스 공항에 마중 나온 한국인 민박집 (그 여행에서 유일하게 실패한 종목이었다) 주인아주머니의 곡예 운전에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찌 됐든 다음날 아침, 대망의 남프랑스의 청록색 하늘 아래에서 잠을 깨어 꿈같은 여행을 시작하였다.


프랑스;샤갈미술관_경향DB



“앙티브”는 니스와 칸의 중간에 위치한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미국가수 “마돈나”는 칸영화제에 오면 칸에 묵지 않고 “앙티브”에 숙소를 구한다고 하던가. 피카소가 여생을 보냈던 해변의 아름다운 미술관에서 찾아본 대가의 발자취들, 하루 종일 넋을 잃고 빠졌던 샤갈 미술관, 생 폴드 방스에서 우연히 만난 샤갈의 묘지, 그리고 에즈, 망통 등 매일 매일을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미술품들에 취해 다니며 훗날 여유가 되면 이곳에 와서 오렌지빛 햇살 아래에서 빛나는 코발트의 바다에 발 담그며 몇 년쯤 살아 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은 불친절하고 영어로는 대화하지 않는다던 많은 조언(?)들도 나의 엉터리 영어에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안내해주던 인상 좋은 프로방스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는 걱정이었다. 그때 마침 칸에서는 영화제가 열리고 있었고 저녁식사를 위해 들렀던 칸 해변의 일식집 한국인(?) 주인이 내가 좋아하는 배우 전도연씨가 다녀갔다고 해서 아쉬워했던 일들. 모나코에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내 지갑을 훔치려 했던 이쁘고 귀여웠던 어린 소매치기들까지 - 운 좋게도 지갑은 찾았기 때문에 - 어느 곳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세상, 그것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 동안 그 현실의 그림엽서 속에서 황홀한 여행을 하던 내 마음에, “나”라는 이 여리고 변덕스런 인간의 마음속에, 묘하고도 믿기지 않는 작은 파문 하나가 일었다. “아름다움도 일상이 되면 지친다.” 그 순간 나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냥 가벼운 홈 시크일 거야” 하며 마음을 다독였지만, 갑자기 저기 저 동방의 작은 나라, 울긋불긋 지저분한 간판들로 가득한 서울거리가 떠올랐다. 여기저기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보도마다 시꺼먼 그 껌 자국들이 거짓말처럼 조금씩 그리워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물론 나머지 이틀 정도의 시간은 다시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 꿈에 젖어 보낼 수 있었지만.

여행이 끝나고 지친 몸으로 내린 인천공항의 미세먼지 가득한 회색의 하늘에서 나는 또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면 지나친 난센스일까? 아름다움. 그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도 마음먹기에 달렸을까?



최백호 |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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