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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 경향신문을 펼치자 ‘부들부들 청년들 우리는 붕괴를 원한다’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 4일자에도 청년 10명 중 4명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생각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겨레도 ‘헬조선 탈출’이 1면을 장식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달력의 새해는 시작되었지만 ‘금가루 흩뿌리는’ 희망찬 새해는 아직 오지 않았다.

‘헬조선’이나 ‘이생망’의 뜻은 예사롭지 않다. 누가 지옥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헬조선에 태어난 것은 전생의 업 때문이니 누가 거스르거나 돌이킬 수 있겠는가? 그래서 노예같이 살 바에야 차라리 다음 생에는 돌덩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청년들이여 자신을 탓하지 말라. 이것은 당신들이 지은 전생의 업 때문이 아니라, 민주와 평등, 분배의 정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기성세대들의 현생의 업 때문이다. 현생의 업은 죽기 전에 돌이킬 수 있다.

과거 군사독재의 미망과 신자유주의를 향해 맹목으로 치닫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치와는 거리가 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뒤척이며 생각해본다. 지난 수년간 우리는 국가와 정치의 존재이유를 알 수 없는 시대를 살아왔다. 국가란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국가가 섬겨야 하는 존재는 누구인지, 정책결정은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혼돈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시스템 문제이다. 국가와 정치의 정체성 자체를 총체적으로 재설계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대로는 모두 죽는 길밖에 없다. 당신 자손은 피해갈 것이라고? 천만에. 조선이 헬조선인 이상 당신의 후손들도 언젠가는 이 천형의 쇠사슬에 걸려들게 된다. 세상은 ‘공평하게’ 돌고 도는 것이다.


청년단체 청년공감 회원들이 10월 9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문화공원에서 청년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청년불만스테이지를 열며 헬조선 뒤집기 딱지치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_경향DB


그러나 국가와 정치의 기능과 역할, 존재이유, 절차적 정의 자체를 총체적으로 새로이 설계하는 일은 현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의회정치제도, 복지사회제도 등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모색하는 혁신적인 논의가 현 체제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상명하달식의 제왕적 국정운영이 첫째 이유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선거에서 34%의 표를 받은 후보가 각각 33%의 표를 받은 2명의 후보를 제치고 의원이 되는 ‘다수결의 폭력’을 해체하기 위해, 낙선자 정당에도 득표수만큼의 비례대표를 할당하는 ‘합의제 민주주의’가 제안되었다. 이 방식은 호남-영남의 지역대립 구도를 완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지만, 기존 의원들의 의도적 침묵으로 논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레기’로까지 불리는 의원 숫자는 절대 늘리지 말아야 한다는 여론이 장벽인데, 이 여론은 정치권이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혁신적 논의를 기대하겠는가?

출구는 없는가? 아니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총체적 개혁을 논할 시기가 아니다. 우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논의를 개방적으로 할 수 있는 혁신의 장을 보장하는 민주정권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헬조선을 ‘헤븐(heaven) 조선’으로 혁신하는 근본적 논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모두 가져야 한다.

총체적 혁신의 장을 보장하는 민주정권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협력이 필수적이다. 총선을 앞두고 몇 개의 야당과 다수의 민간 정치연대, 노조, 농민조직 등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협력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조직에는 정당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낮은 차원의 회의체로부터, 연합, 연맹, 동맹, 전선 등 다양한 수준의 협력이 가능하고 지금은 민주정권 창출을 위해 모두 연대해야 할 때이다. 민주대연합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김근태의 모습이 새삼 그리운 이유이다.

연대를 통해 가장 먼저 이루어야 할 것은 고도의 참여를 끌어내는 일이다. 유권자들은 이미 ‘냉소의 덫’에 걸려들었다. 이것은 야권의 필패를 뜻한다. 회의체든 연합체든 연대조직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총선 100% 참여’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헤븐 조선’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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