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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여전히 관용의 자세다. 관용은 그저 착하기만 해서 자기주장 없이 뭐든지 다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고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관용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다.
우리 사회에는 나와 다른 생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관계들이 많다. 나이, 직급, 학벌, 성별, 인종, 지역, 혹은 종교나 정치적 신념 등이 수많은 장벽들을 만들어내고 상대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관용이야말로 사회 곳곳에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러나 칼 포퍼가 ‘관용의 역설’이라고 말했듯이,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관용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가 없다면 관용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자신을 냉철하게 성찰하고 상대의 입장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힘겨운 노력을 잠시라도 멈춘다면 누구나 불관용의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러기에 촛불집회와 친박집회 사이에조차도, 상호 관용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관용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단호하게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말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관용이 부족한 원인의 하나로 유교 전통의 폐해를 들 수도 있겠으나, 유교의 근본이념 가운데 하나인 ‘충서(忠恕)’는 나의 마음을 다해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관용과 닿아 있다. 관용이 ‘인정하기 힘든 다름을 참아냄’에서 비롯된 데 비해, 충서는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평화적 공존이라는 명분 아래 상호 불간섭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는 관용에 따뜻한 숨결을 더해줄 수 있는 것이 충서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타인의 아픔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괴물에게 베풀 관용은 없다.
세월호 유족을 조롱하고 참사의 진상 조사를 악의적으로 방해하며 거짓 뉴스들을 양산해온 이들, 봉하마을까지 몰려가서 고인의 가족을 능멸하는 것도 모자라 유인물 안 받는다는 이유로 손녀 같은 학생의 따귀를 때리는 이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푼다면, 이 사회에 그나마 존재하는 관용들마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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