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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과 융·복합의 시대에 세대와 이념, 전문분야와 준거집단에 따른 반목의 골은 깊어만 간다. 이해를 위한 일말의 노력도 없이 분노에 찬 비판을 서로에게 서슴지 않고 쏟아붓는다. 합리적 의심과 구체적 확인을 바탕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찾으려는 신중함이 양측 모두에게서 회색분자, 양비론이라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대북관계, 환경문제, 대입전형, 경제정책 등 쉽게 재단하기 어려운 사안들에 대해 너도나도 확신에 찬 쾌도를 휘두른다.
어느 시대든 이견의 충돌은 있었다. 식견과 소신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논쟁과 갈등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사회에서 타협의 여지없는 극단의 반목이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전문가에 대한 존중이 격하되고 언론의 환경도 급변하면서, 시간을 들여 책이나 신문을 읽고 방송을 보기보다는 검색 정보를 부유하며 입맛에 맞는 경로로만 소통하는 것이 대세다. 인터넷 사회관계망의 확장 역시 언제부턴가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끼리의 공유에 제한되고, 여기서 저 놀라운 확신들이 탄생한다. 각종 매체들 역시 이에 편승해서 클릭 수에 좌우되는 실정이니, 이른바 가짜뉴스들이 서식할 최적의 조건이 조성된다. 신뢰도 높아 보이는 통계자료 역시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구성할 수 있다. 엄청난 정보의 바다에서 각자가 섬이 되어 언어의 날만 더 예리해지는 모습을 감내하기가, 참으로 힘겹다.
‘절충(折衷)’이라는 말이 일찍부터 쓰여 왔다. 이견이 갈릴 때 양 극단을 다 고려하고 시비와 경중을 가려 조화로운 대안을 제시함을 뜻한다. 송나라 때 증공은 한나라 유향에 대해서 “잡다한 학설에 현혹되어 절충할 줄을 몰랐다”고 비판하였다. 올바른 준칙을 세워 가려내지 못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유향이 남긴 글을 책으로 편집하여 전한 이가 바로 증공이다. 결점이 많은 책이지만 그 안에 값진 내용들이 섞여 있으니 읽는 이가 절충하여 취사하면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들은 그대로 말하면 되는 줄 아는 구이지학(口耳之學)의 시대에, 사려 깊은 절충의 미덕이 절실하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