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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성은 영어로 폴라리스(polaris)다. 한반도의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 별자리 중간쯤에 있다고 알려진 북극성은 길 잃은 사람의 길라잡이 역할도 하는 붙박이별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포라는 집을 구성하는 가재도구 중 하나인 섬모를 연구하던 10여 년 전 내가 관심을 기울였던 단백질의 이름도 폴라리스였다. 이 단백질에 문제가 있으면 발생 과정에서 몸통의 좌·우측 배치가 달라진다니 세포 안에서도 폴라리스가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는 모양이다. 세포생물학에서 우리들은 특정한 단백질이나 혹은 세포 내 소기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할 때 극성(polar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체의 바깥쪽 표면인 피부나 몸통 내부를 관통하는 소화기관의 표면을 구성하는 상피세포들은 빈틈없이 닫혀 있어야 한다. 상처가 나면 아프기도 하지만 세균이나 곰팡이가 침범하기도 쉽다는 점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세포들끼리 서로 밀착하여 닫혀 있기 때문에 세포의 위쪽 면과 아래쪽 그리고 측면의 환경이 서로 각기 달라진다. 피부 세포의 바깥막은 공기와 맞닿아 있지만 측면은 이웃하는 세포의 측면과 바짝 달라붙는다. 점액을 밖으로 밀어내는 먼지떨이 모양의 섬모는 기도 상피세포의 바깥 면에만 분포되어 있다. 거기가 아니면 섬모의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상피세포의 바깥쪽 막에 섬모가 존재할 때 극성이 잘 유지되고 있다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화학자들은 물을 대표적인 극성 물질이라고 말해왔다. 수소 2개와 산소 1개로 이루어진 물 분자 안에서 전자를 갈구하는 산소 부근에 전자가 밀집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소 쪽에는 전자의 밀도가 적고 따라서 두 원소 간의 전기적 성질이 달라진다. 물의 바로 이런 극성 때문에 소금쟁이가 수면 위에 떠 움직이고 100m에 이르는 미국 삼나무 꼭대기까지 물이 공급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살아있는 생명체에서나 그 생명체 안을 채우고 있는 화학물질 모두에게서 극성은 무척 중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극성은 언제 깨지게 될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이른바 ‘상피진피 전이’일 것이다. 이 용어는 대열을 벗어난 상피세포가 노마드 진피세포로 변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웃하는 세포와 오롱이조롱이 붙어 해독작용을 담당하던 6각형 모양의 간세포가 외씨버선 모양의 진피세포로 날렵하게 탈바꿈한 뒤 혈관을 타고 폐에 둥지를 틀게 되면 간세포로서 자신의 정체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암 생물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암세포가 폐에 전이되었다고 말한다. 세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간에서 붙박이로 해독작용을 하던 간세포의 극성이 깨졌다는 표현을 선호한다.

소화기관에서 몸통 안으로 들어온 포도당은 총길이 12만㎞인 인간의 혈관을 따라 돌면서 영양소가 필요한 세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세포 해부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말은 혈액과 맞닿은 혈관내피 세포 표면에 포도당 운반 단백질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닐 뿐이다. 원래 있어야 할 장소를 벗어나면 포도당을 운반해야 할 이 단백질의 쓰임새가 가뭇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세포나 단백질만이 아니다. 가령 가장 따뜻할 때조차 평균 기온이 10도도 되지 않는 툰드라 지대에 사는 모기들이 사라지면 무슨 일이 생길까? 이곳 물웅덩이 모기 유충들은 썩은 이끼를 분해하는 청소동물이자 물고기들의 먹잇감이다. 성충 모기들은 순록의 피를 빨아 먹는다. 극성스러운 모기떼를 피해 순록은 바람을 거슬러 움직인다. 그러므로 모기가 사라지면 순록의 이동 경로가 달라질 것이고 이들을 쫓는 늑대들의 생존 전략도 분명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기 유충을 먹이로 삼던 물고기들이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찾아오리란 것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한때 병목 단계를 지나올 정도로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다던 인류는 현재 75억 명을 넘어섰다. 그 결과 마천루가 늘어선 대도시들이 남북반구 온대 지방을 따라 난립하고 있다. 특히 북위 30~50도 지역은 그야말로 인간과 그들의 콘크리트 안식처로 가득 찼다. 그 덕택에 원래 있어야 할 곳을 잃은 말 못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고통을 겪는다. 대전의 동물원을 탈출했던 퓨마 ‘호롱이’는 네 시간 동안 자신이 의당 누려야 했을 ‘극성’의 안온함을 온전히 만끽했을까? 닷새 동안 100㎞를 이동해 한사코 김천의 한 산을 고집했던 지리산 반달곰은 자신이 있어야 할 최적의 장소를 찾아낸 것일까? 추운 날 도심으로 내려오는 멧돼지들과 인간이 함께 사는 일은 가능할까?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 인간은 단순히 ‘지구이웃’을 제거하는 가장 손쉽고 이기적인 전략을 자주 선택했다. 구제역에 시달리는 사육 돼지들과 A4 종이 한 장 정도의 공간에서 살던 병든 닭을 그저 땅에 묻어왔을 뿐이다. 다른 모든 생명체의 정당한 서식처를 파괴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만큼 인간의 ‘극성’은 정말 그리도 고귀한 것일까?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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