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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까지만 해도 ‘페이스북’의 이모티콘은 “좋아요” 하나뿐이었다. “싫어요”도 추가해 달라는 이용자들의 요청에, 오히려 “최고예요” 등의 공감 이모티콘들을 추가했다. 그 가운데에는 “화나요”도 있지만, 이는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게시자가 분노하는 내용과 대상에 나도 함께 분노한다는 공감의 표현이다.
분노의 대상이 공적이고 명확할 때 소셜 네트워크 내에서의 확산은 매우 빠르다. 공감을 넘어서 새로운 근거와 논리를 장착한 주장으로 결집되어, 웹서비스 바깥의 현실 세계에 영향을 주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정의(正義) 역시 특정한 시야에 제한될 때가 적지 않아서, 의분(義憤)이라고 믿고 휘두르는 칼날이 의도치 않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마저 날카롭게 파고들기도 한다.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의는 어디에서나 선명하게 보이는 높은 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늘 시비와 이해가 뒤얽힌 현실 속에 섞여 있다. 공자(孔子)의 밝은 눈으로도 늘 정의를 행하는 이를 찾기 어려웠던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몸을 던지는 광자(狂者)와 하지 말아야 할 것만은 지켜내는 견자(견者)를 차선책으로 언급했다. 좌충우돌하는 광자의 의분마저 없다면 현실의 변화는 더욱 요원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지 판단이 어려운 상황 앞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금도를 지키는 견자의 지조도 필요하다.
극심한 혼돈 속에서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다만 내가 던지는 분노의 말이 겨냥하지 않은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는 않을지, 의도적인 정략의 작동원리에 이용될 여지는 없는지 살필 일이다. 어느 한쪽을 놓아버림으로써 선명해지는 정의는 정의가 아닐뿐더러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정죄하는 기준으로 삼을 때 또 다른 폭력이 된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지독히 오래된 관습과 통념에 싸여 있다. 자신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불편하고 아픈 성찰 없이 던지는 말은 그래서 허망할 수밖에 없다. 분노가 쌓이고 걸러져서 현실의 변화로 이어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삼가지 않는다면, 의로운 분노마저 길을 잃고 상처투성이가 된 채 소멸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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