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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낡음과 새로움이 충돌하는 ‘시대의 산물’이지만, 스타는 자체에 내장된 나쁨을 따져 묻지 않는 ‘시스템의 산물’
누군가 영웅이라면 홀로 탁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위대하기 때문이다…대통령의 진짜 의미도 이것이리라
그런 의미를 실현하는 영웅의 등장을 통해 정치가 볼품없는 시대의 폐막과 아름다운 시대의 개막을 기다리고자 한다

쪼잔함, 쩨쩨함, 시시함, 지루함. 작금의 정치를 보고 당장 연상되는 단어들이다. 한마디로 말해 ‘볼품없다’는 것이다. 위대함, 장엄함, 숭고함, 거룩함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정치미학이 사라진 현실에 놓여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 특징 중 하나는 ‘소확행’ 공약의 성행이었다. 잠깐이나마 흥미를 선사하기도 했다. 기발함 때문에 경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가령 탈모 건강보험 공약 같은 게 그 한 가지 예다. 그러나 소확행 공약의 유행은 대통령 선거마저 특정 이해집단의 사적 욕망 충족을 중시하는 민원 해결 정치의 기제가 되었음을 보여준 증거이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마저도 사사로워진 것이다. 이런 식의 정치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적 이익과 욕망을 억압하는 정치는 독재와 전체주의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다원성과 다양성은 사적 욕망의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표출 과정에서 발견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는 그런 사적 욕망의 충족을 보장하겠다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대통령 선거의 목적은 ‘국가’ 원수를 뽑는 데에 있다. 국가는 좋은 체제(민주공화국)의 유지와 재생산을 담당한다. 이를 총괄하고 책임지는 게 바로 대통령(세력)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시야의 범위와 시선의 위치가 넓고 높아야 가능해지는 ‘전체에의 통찰’에 기초해 사적 욕망이 사회 공통의 이익과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한다. 이때 필수적인 감각과 인식의 기초가 바로 균형이다. 가령 불평등이 중요한 문제인 이유는 도덕적 정의를 훼손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걸 해소하지 못하면 공동체가 균형을 잃고 와해되어, 결국 사적 욕망을 분출하고 충족시킬 수 있는 터전이 사라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체제의 유지와 재생산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는 부분에 기초하되 전체를 지향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는 계기이고 장이어야 한다. 이것이 충족되어야 정치가 아름다워질 수 있다. 그래야 아름다움의 기초인 균형과 조화의 구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소확행 공약은 정치를 아름답게 만들 수 없다. 특정 부분의 요구만 수용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의 요구를 다 충족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즉 부분에 기초하되 전체를 지향할 수 있는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부분의 합이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전체 차원에서 추구하고 달성해야 할 가치가 별도로 마련되어야 한다. 결국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사적 욕망의 추구를 유보하고 양보할 수 있게끔 해주는 보다 큰 명분과 실천적 전형의 경우를 창출해야만 한다.

지금의 유력정치인은 영웅? 스타?

그런데도 소확행 공약이 성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소확행 공약의 유행은 산업화, 민주화와 같은 거대 변동이 종료되었다고 여겨지는 시대가 강제하는 정치일 수 있다. 이미 주어진 체제를 더 이상 좋아질 수 없는 완성된 체제라 전제하게 만듦으로써, 보다 좋은 혹은 새로운 체제를 꿈꾸고 낳고 운영하는 거창한 생각과 행동에 대한 요구가 사라지고 기성 질서와 당장의 욕망에 순화된 정치 말이다. 그래서 문명 개척의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하고 차단하고 거세한 시대의 정치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만의 자유와 주권을 ‘수호’하는 문명지체와 왜곡의 상황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혹은 지체와 왜곡을 양적 정도의 조절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이들이 주도하는 정치 말이다.

이런 정치에서 ‘영웅’의 등장은 불가능하다. 정치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도 그렇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선 또 다른 거대 변동이 시작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영웅을 필요로 하는데도 말이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영웅과 스타는 다르다. 영웅은 기성질서의 붕괴 가능성과 부패함에 주목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혹은 체제를 좋게 만들기 위해 자기소멸의 치명적 위기를 감수하면서까지 한꺼번에는 아니어도 전체를 바꾸기 위한 도전에 나선다. 그래서 극적이다. 자신은 물론, 함께하는 이들의 운명과 삶이 그렇다.

이에 반해 스타는 인기를 위해서라면 기성질서의 부당함에도 순응해야 한다. 새로운 도전마저도 그 경계 안에서 시도해야 한다. 경계를 넘어서는 척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넘어서면 안 된다. 위기는 단지 회피의 대상이다. 그래서 극적인 척만 해야지 진짜 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영웅은 낡음과 새로움이 충돌하는 ‘시대의 산물’이지만, 스타는 자체에 내장된 나쁨을 따져 묻지 않는 ‘시스템의 산물’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을 비롯해 많은 추종자와 지지자를 거느렸다는 작금의 유력 정치인들은 영웅인가 스타인가?

작금에 목도하는 변동은 그야말로 근본적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근·현대 문명이 이룬 세계질서를 뒤흔드는 수준이다. 인공지능과 우주개발 산업이 본격화되면서 지능과 세계의 경계는 더 이상 인간과 지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들 산업은 이미 국가 간의 경쟁 산업이 되고 있다. 이들 산업은 고도의 과학기술 역량과 에너지를 비롯한 막대한 규모의 자원을 요구함에 따라 지구 전체 차원에서 노동시장과 기업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 버릴 것이다. 또 다른 거대 변동 요인들도 이미 작동하고 있다. 기후위기와 국제관계의 군사화 및 세계대전 발발의 위험성 증대이다. 기후위기 양상은 지구 곳곳에서 이미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고, 이 때문에 적극적이고도 신속한 대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있는 상황이다. 국제관계의 군사화와 세계대전 발발 위험성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그 현실성이 높아진 상태다. 아직은 러시아 침공의 부당성과 반인륜적 전쟁범죄에 대한 도덕적 분노와 규탄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국제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번 전쟁은 이미 세계질서의 군사화를 강화하고 있으며, 3차 세계대전의 발발 가능성마저 엿보게 하는 징후로 분석되기 시작했다. 이런 전쟁(친화적) 시대에서 민주주의 체제는 형식적 수준에서조차 그 유지가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인권보다는 안보의 논리가 우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시기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세워진 지금의 체제 질서가 불가역적이고 완성된 체제라며 소소한 정치를 허용할 때가 아닌 시대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영웅은 거대 변동기 약자와 함께해

그럼 영웅의 등장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치가 영웅의 등장을 필요로 하는 거대 변동에 집중할 때이다. 그리고 거대 변동이 동반하는 위험 요소의 제거에 초점을 맞출 때이다. 특히 거대 변동의 와중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들, 즉 사회적 약자와 함께할 때이다. 그래서 선거제도와 같은 정치제도가 아니라, 거대 변동의 비용과 고통을 전가하는 체제의 작동원리를 바꿔낼 때이다. 즉 메시아의 진짜 의미, 사회적 다수를 이루면서도 약자의 서러운 처지에 놓여 있는 이들에게 평화로운 삶을 선사할 수 있을 때이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필자가 어찌어찌 할 ‘때’에 등장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영웅이 먼저 등장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영웅이 등장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영웅은 사회적 약자의 삶과 문제 영역의 밖이 아니라, 그 안에서 발견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누가 영웅일 수 있을지 물어보자. 한 개인일 수도 있고 세력일 수도 있다. 대통령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누구든, 또 어떤 지위에 있든 중요한 것은 고통받는 이들과, 또 그들 간의 연대와 협력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느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영웅이라면 그는 홀로 탁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위대하기 때문이다. 국가원수의 지위를 갖는 대통령의 진짜 의미도 이것이리라. 그런 대통령의 의미를 실현하는 영웅의 등장을 통해 정치가 쪼잔함·쩨쩨함·시시함·지루함만 드러내는 시대의 폐막을, 그리고 위대함·장엄함·숭고함·거룩함을 선사하는, 즉 정치가 아름다운 시대의 개막을 기다리고자 한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실천교육센터장
 

■김윤철

 
경희대 교수 및 실천교육센터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세계와 시민’ ‘정치의 인문학적 탐색’ 등의 과목을 가르친다.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노회찬정치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정당> <헬조선 3년상> 등의 저서와 ‘노동존중 정치와 노회찬의 6411정신’ ‘한국 불평등 민주주의의 정치사적 기원’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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