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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정치권 대치는
무이념의 축제라
반지성적이고 반민중적
국민 생명과 인권 지켜낼 
사회적 책임과
권한 공유체계 설계 위해
부정성과 부작용 불구
정치도 이념을 가져야

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극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 대의를 만들어 
새 정치사회적 질서를 연 
국제적 사례들이 있다
작금의 한국 정치사회가 
주목할 지점이 그것이다



광장과 거리에서 또다시 대치가 이어지고 있다. 한 측은 윤석열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고, 다른 한 측은 정권 사수를 내세우고 있다. 오늘 글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금의 그와 같은 대치는 반지성적이며 반민중적이다. 왜냐고? ‘무이념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열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묶어낼 가치 규범과 비전과 전략, 그리고 그것을 담고 있는 언어와 실천 프로그램 모두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의 궁극적 목적, 다수 약자인 민중의 고통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측이 윤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유는 이태원 참사가 결정적이다. 윤 정권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무능했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으며, 심지어 책임을 회피하고 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앗아가는 또 다른 비극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측이 윤 정권 사수를 주창하는 이유는 퇴진을 요구하는 측의 의도가 기본적으로 불순하다는 데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각종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를 막고 야당이 정국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한 정략적 행위라는 것이다. 

‘중립적인 척하는 먹물들의 지겨운 양비론’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어느 한쪽만 맞거나 틀리지 않는다. 윤 정권의 무능함과 무책임은 명약관화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퇴진 집회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자그마한 초석이나마 놓을 수 있을까? 정략이라는 혐의를 덧씌우는 대치 현실의 사고 체계와 그것의 촘촘한 회로망을 먼저 벗어나거나 부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정권-검찰 측의 야당에 대한 수사를 저지하기 위한 의도와 연결돼 있다는 의혹 제기는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문제되고 있는 것은 이태원 참사다. 퇴진 요구에 동참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정권의 약속과 그것을 지켜낼 방도의 제시를 요구한다. 홀로 책임지거나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 야당과의 협력을 비롯해 전(全) 사회에 걸친 ‘책임과 권한의 공유체계’를 설계해 제시하면 된다. 이것이 윤 정권 사수의 길이다. 

이때 필요한 게 바로 정치 이념이다. 즉,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과 관련된 사안에 대한 거론마저 툭하면 정략이라고 몰아치는 사고체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도, 또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낼 전 사회적 책임과 권한의 공유체계를 설계해 제시하기 위해서도 정치는 이념을 가져야 한다.

혹자들은 작금의 대치를 ‘이념양극화’라는 관점과 용어로 이해하고 설명한다. 진보와 보수 간에 벌어지는 이념적 다툼이라는 것이다. 한 측이 친야(더불어민주당) 세력이라면, 다른 한 측은 친여(국민의힘) 세력이다. 절반만 맞다. 자기 신념과 지식만 옳다 여기는 착각에 빠져 타자를 배제하고 공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 이념의 부정적 속성 혹은 부작용의 측면만 강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탈이념’을 내세우고, 진보도 보수도 아닌 중도에서 길을 찾자고 한다. 하지만 탈이념은 정치를 당장의 이익(다툼)을 중시하는 아수라장에 가두어두자는 또 다른 이념일 따름이다. 그리고 중도는 정치를 한층 더 모호하고 불투명하고 기회주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가상의 길이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방식의 이해와 설명은 지배적이다. 

정치에서 이념을 제거하고 삭제해야 기성 질서를 원래부터 존재해왔던 것으로 본성화하고, 또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이라고 영구화하며, 대안 세계와 삶을 위한 모색과 도모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의 욕망에 매달려 살아가게 만든다. 적어도 지금의 질서의 연장으로 미래의 상을 한정해야 한다. 낯설고 새롭고 달라진 세계에 대한 지향은 미래가 아니라, 무지함이고 무모함일 따름이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경제적 질서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반공주의(반북주의)와 성장주의와 시장주의와 능력주의 질서는 그저 본래적인 것이다. 그것이 낳은 전쟁의 위험과 불평등과 차별마저도. 그래서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들은 ‘영끌’을 통해서라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게임의 룰을 따라 당장의 생존과 부의 증식에 나서야만 한다. 

이념 양극화 관점은 절반만 맞다

이념은 그 부정성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필수적이다. 정치라는 개념 자체 혹은 현실적 존립의 의의와 근거가 이념을 전제한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갖고 처지에 놓여 있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지속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실천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서로의 다름을 포용하는 동시에, 함께 품을 생각과 뜻과 마음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가치와 규범과 비전과 전략과 행동의 내용과 형식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념이다. 이념은 그런 것들을 담고 있기에 사람들을 공통의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주체가 되게 하고, 그들 간의 연대의식을 고취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적 접착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념은 또한 오늘의 희생과 양보를 내일의 희망과 보상으로 연결 짓고, 그것을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기 위한 전달과 소통의 언어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의 다툼을 풀어갈 실마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념이 “이런 것이다”라는 개념적 언명 자체가 사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념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윤 정권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공통성을 찾아낼 수 있을 성질의, 즉 사람들이 지금 당장의 극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따르고 세워낼 미래의 길과 상을 제시해야만 소모적인 다툼을 끝낼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그게 가능하겠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쉽지 않다. 아예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윤 정권 퇴진 vs 사수’ ‘친민주 vs 친국힘’ ‘진보 vs 보수’의 구도를 가로지르고 넘어서며 미래의 대안사회를 열 새로운 다수 형성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그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었거나 봉쇄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극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치사회적 질서를 열었던 미래정치동맹의 구성 사례들이 있다. 노농 연대에 기초한 사회민주당의 헤게모니 형성과 집권으로  노사 타협을 통해 만들어진 스웨덴 복지국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진영 대립을 넘어 파시즘에 대항했던 2차 세계대전 때의 연합국 승리, 전쟁 승리를 위한 보수당과 노동당의 합의에 기초해 만들어진 영국의 ‘자유주의적 복지’ 국가와 전후 노동당을 계승한 보수당의 산업 및 사회정책, 남부지역과 노동자계급과 소수인종 간의 연합을 통해 다수를 이뤄 대공황 피해의 완화를 시도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등이 유명하다.

한국은 이런 사례들을 모형화해 따라갈 상황에 있지 않다. 세계 10위권의 국가로서 기성 대국들의 경험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미 겪은 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선 사례들을 특정한 이념과 체제에 대한 옹호와 추종의 관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저들 나라 모두 정치경제적으로 썩 녹록한 현실에 놓여 있지도 않다. 하지만 이들 사례 모두 목적과 정도와 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나 전쟁승리 혹은 자본주의 대위기 극복이라는 ‘공통의 대의’를 만들어 기존의 균열과 갈등 구도를 재구성했던 실천들이다. 이 실천 경험 자체가 한국의 정치사회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이념 너머 미래의 길은 있다

윤 정권 퇴진 요구 집회에 몇몇 현역 의원들이 참석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참석 여부는 각자의 자유라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묻자. 그들과 그들이 속한 정당에. 또 이들을 비난하는 여당과 그 소속 의원들에게도 묻자. 그 와중에라도 새로운 길의 모색과 다수의 형성을 위한 이념과 구도의 (재)구성에 열심이냐고. 집회에 나오든 아니든 그와 관련한 구상과 계획을 제시할 준비는 하고 있냐고. 만약 그렇다 한다면, 지금의 대치는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재 | 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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