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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소설가


대전 계족산을 다녀왔다. 계족산 황톳길은 총 14㎞다. 강화에서 서울까지 시멘트길은 고무타이어 바퀴를 타고 가고, 서울에서 대전까지 철로 된 길은 빠른 쇠바퀴를 타고 갔다. 이어 지인의 자동차를 타고 닭다리산 들목까지 가 바퀴를 벗었다. 그제야 황톳길을 만나 내 몸을 담고 다니던 신발에서 내려섰다. 바짓가랑이를 걷고 양말도 벗었다.

맨발. 흙을 밟으며 괜히 쑥스러워졌다. 집에서는 늘 맨발로 생활하면서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길에서는 달랐다. 숫기 없는 사내애처럼 발이 수줍음을 타며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평소와 달리, 길의 맨살을 맨살로 만나자, 발이 길을 낯설어 해서 그런 것 같았다. 또 길은 늘 맨살이었고 나만 늘 신발을 신은 채였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 뒤에 오는 미안한 맘의 영향도 있는 듯했다. 엄밀히 생각해보면 길도 늘 맨살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대부분 길은 타의에 의해 시멘트를 입고 있었고, 그런 길을 나는 신을 신고 만났던 것 아닌가. 길은 시멘트를 벗고 나는 신발을 벗고 맨살 대 맨살로 우리는 서로를 조심스럽게 느끼며 통성명을 나눴다.

“맨발로 들길, 산길, 냇가를 뛰어다녔던 어린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고무신에 땀이 나면 미끄러워 그냥 맨발로 다니는 게 더 편하기도 했지요. 그 당시는 신발을 신은 것보다 맨발로 다니는 게 더 익숙했으니까요. 발이 내디딜 수 있는 길의 지점들을 기억하고 있어 다칠 염려도 없었고요. 또 신발을 아끼려고 일부러 맨발로 다니기도 했지요. 장마 뒤 세어진 물살에 물을 건너다가, 신발을 놓쳐 떠내려가는 신발을 찾으려다 죽은 친구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요. 물살에 휩쓸린 시신을 찾고 보니까 고무신을 움켜쥐고 죽었다는 이야기였죠. 세월이 참 빠르게도 흘러, 그때와 달리 현대인들의 발은 대부분 신발 속에 갇혀 삽니다. 그동안 답답했을 발이 황톳길을 만나니, 그동안 참았던 숨을 토하는 것인지 안도의 숨을 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야 숨을 제대로 쉬는 것 같네요.

 

대전 대덕구 장동 계족산 황톳길을 찾은 시민들 ㅣ 출처:경향DB

학습독서 공동체 ‘백북스’가 개최한 계족산 북콘서트 시낭송에 참가한 나는 잠시 지역신문 기자와 황톳길 위에서 맨발로 길을 걷는 소감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길이 초입부터 시원한 나무 그늘길이라, 여름에도 걷기 좋은 길이라는 이야기를 나눌 때, 맑은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신발을 보관할 수 있는 신발장, 발 세척장, 발을 말릴 수 있는 에어콤프레서가 설치되어 있는 곳을 지나자, 길은 완만한 경사로 내 발을 읽기 시작했다.

바닷가에 살아 갯벌을 맨발로 걸어보기는 했으나 산길을 맨발로 올라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소나기에 젖은 황톳길이 미끄러움으로 몸을 흔들어주며 잊고 살았던 몸의 균형감각을 일깨워줬다. 산속으로 올라온 피아노가 있고 연미복을 입은 성악가들이 공연 준비를 하고 있는 무대를 지나고도 행사시간이 남아 계속 길을 올랐다. 길가 나무에는 사람 발자국 형상의 설치물들이 나무를 오르고 있기도 했다. 나를 비켜 가며 맨발로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사람들은 마치 무슨 경건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진지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부활절에 새 신발을 맞추어 드렸습니다. 도화지 위에 한센인의 발을 올려 놓고 연필로 그어서 발 모양들을 떴는데, 발가락이 없거나 뒤틀려 있어 감자 모양, 계란 모양, 가지 모양 등등의 해괴망측한 발들을 처음으로 보고 마음이 아팠던 기억도 있습니다. 착화식 날 생전 처음으로 신어보는 신발을 신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박수치며 노래하던 한센인의 환한 얼굴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태석 신부의 글이 떠올랐다. 남수단 톤즈에서 한센인들과 함께 생활하던 이태석 신부가, 통증을 잘 못 느끼는 그들이 맨발로 생활하다가 발을 쉽게 다쳐 살이 썩어들어 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신발을 맞춰줬다는 글이다. <울지마 톤즈, 그후…선물>이라는 책에는 한센인들의 발을 대고 그린 그림을 찍어 놓은 사진이 있다. 나는 그 사진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그림 하나를 만났다. 어찌 그 그림이 단선이고 단색이랴. 그 그림을 그리며 오갔을 이태석 신부의 만감, 얼마나 깊고 푸르렀겠는가.

고라니가, 산새가, 소나기가, 진달래꽃잎이 맨발로 지났을 황톳길을 걸었다. 흙에 박혀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낙엽에 내 삶을 달아보며 걸었다. 내 발의 감각이 살아나 흙에 내려앉은 나무들 그림자의 감촉, 나무 그림자마다 다 다르게 느낄 수 있는 날 올 수 있었으면, 희망하며 걸었다.

한 독지가가 있어, 피아노를 산으로 끌어올리고, 시멘트길에 황토를 깔아 놓아, 그동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길을 만나보았다. 시멘트길 위에 황토를 깔아 놓은 사람의 마음도, 톤즈의 한센인 발에 신발을 선물했던 이태석 신부의 마음처럼 아름답고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문명의 신발을 너무 오래 신고 살아, 마음이 다치는 것도 모르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마음의 신발을 한번 벗어보라고, 저리 붉은 황톳길을 깔아 놓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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