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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죽고 나 죽자.”
장애를 가진 이들 모두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발달장애인 가족의 사망 소식을 추도하던 장애인 국회의원조차 가족에게서 “너 죽고 나 죽자”는 내리사랑을 강요당한 적 있다고 고백할 정도이니, 사실상 대한민국 모든 장애인이 ‘너 죽고 나 죽자’는 말을 견디며 살아온 것 같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30년 전, 의료사고로 중증장애인이 되었다. 당시 20대 나의 부모는 온갖 사회적 차별과 배제에 내몰리던 날이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은밀하고 잔혹한 ‘내리사랑’을 예고했다. 내리사랑의 구체적 실천 방식은 다양했다. 어느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떨어져 죽겠다는 계획 아래 조수석에 묶인 채 죽음의 질주를 경험하거나, 두꺼운 부엌칼에 찔리거나 베인 끝에 피를 보는 방식이었다. 유년기 겪었던 의료사고의 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몰리고 내려앉은 내리사랑을 실천하려던 가족으로부터 도망쳐 홀로 응급실에 가거나, 아무도 모르는 동네로 멀리 도망가 길가에서 노숙했던 생존의 발버둥은 아직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끝내 살아남았으니, 결과적으로 모두 미수로 그쳤지만, 내가 성공적으로 죽임을 당했다면 내 부모도 죽었을 것이고, 다음날 나는 부모와 함께 ‘동반자살’로 어느 신문 한 귀퉁이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분명 나는 죽음의 동기와 무게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망자는 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사회의 장애인들은 힘겹게 살 바에 죽는 게 낫다 여겨지는 존재이므로 자살하는 것이 살해당하는 것보다 익숙한 소식이었으리라.
사회로부터 내몰려 자녀에게 내려앉은 잔혹한 부모의 내리사랑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사회복지 사각지대가 여실 없이 드러난 지난 약 2년 동안 8명의 발달장애인 및 중증장애인이 가족으로부터 살해당했다. 2020년 3월 제주에서는 고교생의 발달장애인과 어머니가 자동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같은 해 4월 서울에서는 4개월의 발달장애인이 사망했다. 같은 해 6월 광주에서는 20대의 발달장애인과 어머니가 사망했다. 2022년 3월에는 경기 수원시와 시흥시에서 각각 7세와 20대 발달장애인이 살해당했다. 5월에는 6세 발달장애인과 30대 중증 뇌병변장애인이 살해당했다. 복지 사각지대와 장애인과 그 가족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겪어온 부모들이 택한 왜곡된 내리사랑은 끝내 끔찍한 살인을 낳았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0세부터 30대까지, 모든 피해 장애인들은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소리 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지난 2년간 발달장애인 자녀를 죽인 부모들은 대부분 자녀와 함께 죽었거나, 죽기를 시도했다. 죽지 못한 이들은 결국 자수했거나, 다른 가족에 의해 발견되었다. 체포에 순순히 응하면서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한편, 내리사랑을 택하지 않고, 발달장애인 자녀를 살해하지 않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모도 있다. 작년에만 세 사람이다.
격월에 한 번꼴로 발생한 필연적인 사회적 참사 속에 국가는 말이 없었다. 조문조차 없었다.
죽이는 것보다 죽이지 않는 결심에 더 큰 용기가 요구되는 사회. 망자가 된 국민의 이번 생 마지막 결정이 헛되지 않도록, 이제라도 국가가 나서서 그 책임을 다하길 바란다.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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