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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자기 이름 석 자를 건다는 것인데 공개 서명을 남에게 요청할 때는 명분과 대의가 있어야 한다. 이번에 우리 고장에서 세월호 서명을 받기로 하면서 대의와 명분은 두말할 필요가 없기에 준비할 것은 서명대와 서명지뿐이었다. 모든 일에는 생각 못했던 장애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큰 배움을 얻게 된다.
장날을 골라 ‘장수군 시민연대’ 회원 다섯 사람이 각자 준비한 도구를 가지고 모이기로 했는데 서명대를 가져오기로 한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사무실 문이 잠겨 있어 책상을 꺼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트럭까지 몰고 갔는데 허탕이었다. 급히 장터 옆에 있는 꽃집에 가서 적당한 책상을 하나 달라고 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주인이 옆집까지 뒤지면서 동분서주했지만 알맞은 게 없었다.
하지만 간단히 해결되었다. 농협에 갔더니 직원이 2층 강당에 올라가 서명대로 적당한 좁은 책상 두 개를 직접 내 트럭에 실어 주었다. 모두 세월호 서명이라는 말을 듣고 베풀어 준 호의였다. 이름 석 자뿐 아니라 몸수고와 시간까지 내주신 분들이다. 이른바 세월호에 대한 민심을 보는 순간이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진상규명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지역아동센터에 근무하는 회원이 출근시간을 미뤄놓고 왔는데 서명용지와 세월호 유가족 성명서, 현수막을 가져왔다. 서예를 하는 회원 한 분은 크고 작은 벽보와 팻말을 만들어 왔다. 미리 골라 두었던 장터 다리 위에다 좌판을 깔았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명당자리였다. 두 번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터 관리인이라는 분이 나타나 좌판을 치우라 했다. 장터 구석을 가리키면서 화장실 옆 공터로 가란다. 다리 위에는 한쪽만 허용되는데 이미 한쪽은 장사꾼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좋은 일 하면서 누구에게든 민폐를 끼칠 수 없는 일이라 직접 가서 살펴본 결과 위치가 좋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도 적고 잘 보이지도 않았다. 통행인들에게 방해가 안되게 하겠다고 시장 관리인에게 다시 사정을 하는 중에 서명자가 벌써 등장했다.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천천히 걸어와서 서명을 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고구마순을 샀던 분이다. 할아버지는 농사도 지으면서 비닐하우스에 모종을 키워서 장날 내다 파시는 분으로 지난 장날에 고구마순을 사려고 하니 다 떨어졌다고 하면서 자기 농장으로 찾아오면 주겠다기에 다음날 일부러 농장으로 찾아가서 고구마순을 샀었다. 할아버지가 고구마순을 하도 많이 주셔서 달라는 가격에 1000원을 더 드렸더니 이번에는 곁에 있던 할머니가 대파 모종을 두 다발이나 덤으로 줬었다.
할아버지에 이어 다리 위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와 전동공구를 파는 아저씨까지 서명을 해 주셨다. 묵묵히 이를 본 시장 관리인은 우리가 조금 옆으로 옮겨 다리 위에서 서명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좌판서명뿐 아니라 상가 방문서명도 시도했다. 약국에 들어갔더니 할아버지 약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서명하는 단체가 어디냐고 물었다. 장수시민연대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서명을 하려면 무슨 취지문이나 설명서가 있어야지 그냥 어떻게 서명을 하느냐고 했다. 가족 성명서를 보여드렸더니 서명하셨다.
보험회사 사무실도 들렀다. 여직원이 일어서서 반색을 하며 반겼다. 차까지 대접해 주셨다. 알고 보니 내가 작년에 작가초청 강연을 했던 학교의 학부모였다.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랑 손님들이 모두 서명을 해 주셨다. ‘서해 훼리호’나 삼풍백화점 사고 피해자들도 다 도와야지 왜 세월호만 도와주냐던 할아버지 한 분은 가족 성명서의 ‘안전한 나라 건설을 위한’이라는 문구를 보여줬더니 서명을 했다. 오전 11시가 좀 넘어서 장수시민연대 자문위원께서 오셔서 점심을 사겠다고 우리를 다 식당으로 데려갔다.
아, 날씨마저 서명을 왔다. 하늘은 유난히 맑고 잔잔했다.
전희식 | 농부, ‘똥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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