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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학생에게 특정 정치사상을 주입하려 했다는 한 학생의 주장으로 시작된 인헌고 사태가 “정치 편향 교육은 없었다”는 서울시교육청의 특별장학 결과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지 않고 있다. 급기야 해당 주장을 처음 제기한 학생은 시교육청 앞에서 삭발식을 열며 “정치공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사퇴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 보수단체는 직무유기 등을 주장하며 조 교육감을 검찰에 고발했다.

인헌고 사태를 들여다보면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첫번째는 학교 내에서 발생한 사건임에도 학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외부의 ‘세력’이 있다는 점, 두번째는 그 세력이 ‘극우·보수’라는 점이다.

학생이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지를 하든 지원을 하든 자유다. 문제는 그 ‘의도’다. 인헌고 사태는 현재 ‘전교조 해체’ ‘정권 퇴진’ 등 온갖 정치색이 개입돼 있다. 피해를 주장하는 학생보다 지지세력의 목소리가 더 크다. 이쯤 되면 누가 누구한테 정치사상을 주입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인헌고 학생의 주장이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에는 지지세력 탓도 있다.

지금은 고등학교가 말 그대로 ‘학교’의 개념이지만 과거 독재정권 시절 고등학교는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시작이 고등학생들의 반독재 시위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많은 대학이 설립되고, 고등교육이 대학으로 이관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의 근거지도 대학으로 이동했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고등학교에는 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둔 학내 동아리가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인헌고 사태를 적극 지지하고 나선 세력이 극우·보수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인헌고 사태의 시작은 이 학생이 ‘성평화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생긴 지도교사와의 갈등 문제였다. 그리고 이 동아리는 ‘성평화’를 외치는 한 시민단체가 조직한 연합동아리 중 하나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인헌고 사태의 근간이 이 시민단체와 ‘성평화’라는 개념에 있다는 뜻이다.

이 시민단체의 대표가 지난해 3월 한 언론과 한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그는 10·20대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에 민감한데, 보수가 이를 놓치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뒤집어보면 보수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을 활용하면 10·20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헌고 사태에 극우·보수가 적극 지지를 보내고 지원하는 게 한편으론 이해가 된다. 인헌고 학생이 삭발하며 조 교육감 퇴진을 외친 날로부터 일주일 뒤 송희경 자유한국당 의원 등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성평화 교육의 필요성’ 관련 토론회를 열고 인헌고 학생을 초청했다.

정치란 게 그렇다 치자.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젊은층 지지율 올리기에 도움이 되고, 이것이 내년 총선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뭔들 못할까. 하지만 10·20대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에 민감하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있다. 이들이 말하는 ‘성평화’라는 개념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돼서다. 요지를 들여다보면 남녀가 젠더이슈로 갈등하거나 싸우지 말고 서로 인정할 건 하고 존중하면서, 말 그대로 ‘평화롭게’ 지내자는 취지로 들린다. 문제는 뭘 인정하고 존중하냐인데, 여기에는 여성혐오나 남성우월주의 등으로 해석될 만한 주장들이 넘쳐난다.

페미니즘으로 둔갑한, 일부 여성들의 과격한 혐오주의가 잠시 대중의 시선을 끄는 것을 놓고 보편적인 양성평등의 개념이나 페미니즘 전체를 매도하거나 부정하는 것도 위험해 보인다. 현재 우리 사회가 그나마 성취한 양성평등의 수준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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