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존경하는 벗 홍대용이 죽었다. 박지원은 벗의 죽음을 기리는 비문을 “홍대용이 죽은 지 3일 후, 중국으로 사신 가는 문객이 있었다”라는 건조한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그 인편에 중국에 있는 홍대용의 벗들에게 부고를 전하는 내용과 홍대용이 중국학자들과 각별한 교분을 맺은 사연들로 비문의 대부분을 채웠다.

비문의 목적은 고인을 칭송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필담 몇 번 만에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교유를 지속했음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어떤 칭송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홍대용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고도의 수사라고 볼 수도 있다. 중국 전역에 홍대용의 부고를 알리고자 한 것 역시, 조선 한 귀퉁이의 비석에 새기는 글만으로는 홍대용을 기억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비문을 읽는 감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박지원은 홍대용의 죽음이 웃으며 노래하고 춤출 일이라고 하였다. 이제 그는 물리적 거리나 시대적 관습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노닐며 벗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홍대용은 수학과 음악에 해박한 이론가였고 지구자전설을 주장한 천문학자였지만 당시 조선은 그를 알아주기는커녕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헐뜯기 일쑤여서, 그 기발한 발상과 탁월한 능력을 감추고 세상에 뜻이 없는 양 묻혀 지내야 했다. 천편일률의 협소한 조선이 홍대용을 품을 수 없었기에 외국의 벗들을 들먹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는 18세기 조선의 풍경이다.

십대 초반을 체스 챔피언으로, 십대 후반을 게임 제작자로 지내던 소년이 명문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 후 게임회사 사장으로 활약하다가 공부가 필요해서 다시 박사과정을 밟았다고 한다. 세간의 화제가 된 알파고 개발자의 이력이다. 물론 천재의 예외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이 천재가 우리나라에서 십대를 보냈다면 대학에 들어갈 수나 있었을까? 우리나라의 대학원이 그의 필요를 유연하게 채워줄 수 있었을까? 단일한 길을 정해두고 학생들에게 줄서기를 강요하고, 대학교마저 정부가 주도하는 일방으로 길들이려 하는 사회에서, 인공지능 개발에 갑자기 국가가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70년대 기능올림픽 선수를 키우고 제조업 육성하듯이 뚝딱뚝딱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풍경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일반 칼럼 > 송혁기의 책상물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활한 질문  (0) 2016.04.19
역사, 기억, 변화  (0) 2016.04.05
과거는 바뀔 수 있다  (0) 2016.03.08
청렴의 이로움  (0) 2016.02.23
한류와 한국학  (0) 2016.02.02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