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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아사히신문 기자였다가 정년을 포기하고 50세에 퇴사한 이나가키 에미코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반향을 일으킨 그의 산문집 <퇴사하겠습니다>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된 직후였다. 50대 비혼 여성이 사표를 던지고 나서 삶은 오히려 더 풍요로워졌다니 어쩐지 ‘의문의 1패’를 당한 것 같은 기분으로 청한 인터뷰였다.

그는 회사라는 ‘키높이 신발’을 벗어던진 후 집도 줄이고 물건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미니멀리즘으로 살아보니 진짜 ‘행복’을 느낀다고 했었다. 당시 그의 속내를 옮기며 ‘나라면’이라는 감정 이입까지 하면서 꽤 여운이 남았다. 그렇다 해도 냉장고도 밥솥도 없이 살기는 쉽지 않으니 나만의 작은 노력을 하기로 했다. 옷가지며 집 안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들을 내다버리는 일부터 실행에 옮겼다. 지금도 물건을 사들이지만, 꼭 필요한 물건만 집에 들이려고 한다. 대형마트에 안 간 지는 이미 오래됐다.

그러던 어느날 클릭 몇 번이면 되는 온라인 장보기가 나만의 ‘미니멀 라이프’를 비집고 들어왔다. 새벽배송은 신세계였다. 첫 주문은 낭패를 보았지만 말이다. 일단 잠을 설쳤다. 새벽 5시가 되기도 전에 주문한 식재료 도착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 소리를 들었다. 메시지에는 현관 앞에 배송한 사진까지 친절하게 첨부돼 있었다. 부리나케 문을 열어보았지만, 물건은 없었다. 휴대폰 사진을 몇 번 들여다본 후에야 내가 주문한 물건이 다른 집으로 간 것을 알아차렸고, 내가 주문한 상자를 남의 집 문 앞에서 훔치듯 들고 온 게 나의 첫 새벽 장보기다.

그날 이후로 새벽배송은 나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과도하게 딸려오는 포장재가 문제였다. 게다가 내 친구는 나 같은 주문자 때문에 택배 종사자들의 ‘밤이 없는 삶’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면박을 줬다.

편리함 뒤에 숨은 그림자라고 해야 할까. 온라인 시장이 늘어나면서 각종 일회용품 쓰레기 증가와 함께 배송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가 부작용으로 불거진다. 넘쳐나는 쓰레기로 인해 매립지는 포화상태이고 소각시설도 한계에 직면했다. 올 1월부터는 수도권매립지에 들어올 수 있는 생활쓰레기양을 지자체별로 할당해 제한하는 ‘반입총량제’를 실시하고 있다. 쓰레기양이 예상보다 빨리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력에만 과도하게 의존하는 배송시스템도 문제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긱 이코노미’(비정규직 프리랜서 근로 형태가 확산되는 현상)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이 일하는 택배기사 리키는 소변을 해결하기 위해 작은 페트병을 차에 가지고 다닌다. 켄 로치 감독은 이것이 “새로운 형태의 착취”라 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플랫폼 사용자이기도 한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회시스템이 변화하면 누군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하기 마련이다. 그게 쓰레기 대란으로,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인해 저임금 노동자만 남는 상황으로 올 수도 있다.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는 데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는 바뀔 수 있다곤 하는데, 쓰레기 때문에라도 당장 온라인 장보기를 그만둬야 하는가.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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