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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리처드는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한 음식들을 먹으며 자란다. 부모는 지원과 관심을 쏟아붓고, 리처드는 좋은 학교에서 질 높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반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폴라는 어려서부터 병원을 드나들고, 맞벌이를 하는 부모를 기다리느라 늦게까지 혼자 시간을 보낸다. 열악한 학창 시절을 보낸 폴라는 대학에 가서도 학비를 마련하느라 쩔쩔맨다. 같은 시각 리처드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인턴십까지 경험한다. 몇 년 뒤 둘이 마주친 곳은 리처드의 성공 축하연. “노력했을 뿐”이라고 겸손해하는 리처드의 옆을 음식을 서빙하는 폴라가 어두운 표정으로 스쳐간다.
리처드와 폴라는 뉴질랜드 시사만화가 토비 모리스가 그린 만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노력을 통해 얻어냈다는 성공이 본디 부모로부터 상속됐다는 점을 강조하는 만화로, 리처드와 폴라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다.
부모의 소득과 학력, 직업에 따라 자녀들의 진학과 취업, 소득을 추적한 연구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수저’는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상속되고 있었다. 소득이 많고 부모 학력과 직업이 좋을수록 자녀가 특수목적고에 진학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높은 상위권 대학 진학률과 대기업 취업으로 이어지며 불평등의 고리를 완성했다. 정규 교육과정뿐만이 아니다. 영·유아기 인적자본의 영향력을 조사한 연구를 보면 고소득층 가구 아동의 의사소통 능력이나 문제해결 능력이 저소득층 아동에 비해 더 높게 나타나는데 이런 차이는 이후 학습 능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됐다. 대학 등록금을 훌쩍 뛰어넘는 놀이학교나 영재학원 수가 매년 폭증하는 배경이다.
외국이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당장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을 주관하는 ‘칼리지보드’의 연례보고서만 봐도 부유한 가정의 자녀일수록 SAT 점수가 높다는 결과가 매년 반복적으로 도출되고 있다. 하버드, 코넬, MIT 등 ‘아이비 플러스’ 입학생 중 가구소득 상위 20%와 최상위 1% 가정 출신의 비중은 압도적이다. 소득 하위 20% 가구 출신 학생은 전체의 3.8%에 불과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가 그의 새로운 저서에서 “이들의 입학이 정말로 오직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배경이다.
평등과 공정을 주요 국정철학으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지만, 역설적이게도 ‘능력이 곧 공정’이라는 목소리는 더 커졌다. 기계적 평등에 대한 젊은층의 반발은 “공동체 의식이 없다”거나 “이기적이다”로 일축하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그들 일부 역시 폴라 같은 현실을 딛고 일어선 ‘을’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진단이 틀리지는 않았다. 모든 연구가 ‘부모의 능력이, 자녀들의 능력’으로 세습된다는 결과를 가리키고 있다. 문제는 해법이다. 더 정밀하고 더 공정하게 조정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 사회적 합의까지 이끌어낼 수 있을지다. 지난 주말 20대 대통령 선거 대진표가 완성됐다. 한국 사회에 산적한 수많은 숙제들 사이에서 부디 이 문제가 관심에서 소외되지 않고 끝까지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길 희망해본다.
이호준 정책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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