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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어놓은 껌 종이를 펴 냄새를 맡곤 하는 소녀에게
도라지꽃이 피어난 꽃밭 앞에 쭈그려 앉은 소녀에게
아직도 집 떠난 엄마 냄새가 나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이곳은 두 마리 분의 개똥을 내다 버린 공터였다 말을
못하는 막내이모를 위해 돌아가신 할머니가 만든 도라지
꽃밭이었다 흰색 보라색 낮 별들이 무슨 죄를 짓고
하늘에서 추방된 곳이라 소녀에게 말할 수 없었다
새카만 말들을 만드는 벌을 받는 곳이라 말할 수 없었다
까맣게 탄 소녀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었다
한순간만 기억나는 뙤약볕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 활짝 핀 낮 별들이
붉은 눈을 비비며 우는 소녀와 태양뿐인 하늘을 지켜보았다
이윤학(1965~ )
도라지꽃을 보면 왠지 슬펐다. 아침이슬 머금은 몽우리를 따서 몰래 다가가 누이 얼굴에 대고 누르면 몽우리가 톡 터지면서 이슬방울이 날아갔다. “앗 차가워”하며 눈 흘기는 예쁜 누이의 얼굴은 괜히 서글펐다. 동생에게 당했다는 억울함이나 남의 도라지밭인지라 함부로 꽃을 따지 못해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소복을 입은 듯한 도라지꽃밭에만 가면, 누이가 어딘가로 떠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새벽이슬을 밟고 몰래 떠나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 시는 정(情)과 한(恨)이 교차한다. “집 떠난 엄마”나 “말을/ 못하는 막내이모”, “돌아가신 할머니”처럼 가까운 사람의 부재가 한이라면,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시인의 시선은 정이다. 껌은 집을 떠나기 전 엄마가 어린 딸에게 주고 간 조그만 선물이다. 껌 냄새가 사라지면 엄마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봐 고이 접어 간직했으리라. 도라지꽃밭은 떠난 엄마와 돌아가신 할머니, 키우던 개에 대한 그리움의 공간이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한편의 동화 같은 시다.
김정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