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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먼지의 말

opinionX 2020. 1. 28. 10:12

새해를 병원에서 맞았다. 병실에는 네 명의 환자와 간병인, 보호자들이 생활을 하고 있다. 앞자리의 아주머니는 중국서 왔는데 식당에서 일하다가 다리가 으깨졌다. 이 때문에 한국 온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일을 쉬어본다. 그 옆 침대에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몸으로 들어와 얼굴에 겁이 가득한 할머니가 있다. 자식들은 잘 오지 못한다. “둘째 아들인데, 오늘 오려고 했는데 일이 밀려서 못 온대.” 전화가 올 때마다 간병인이 귀에 대고 소리를 친다. 남의 돌봄을 받는 것이 낯선 할머니는 간병인도 어려워한다. 

할머니의 맞은편 침대에 있는 분은 반대로 간호사도 아랫사람 부리듯 호령한다. 위아래 서열이 분명해서 요구사항이 있으면 간호사한테는 ‘지시’하고, 의사한테는 ‘부탁’한다. 돈의 힘이지 싶었는데, 식당 장사로 돈을 벌어 이제는 다달이 집세 받는 건물도 있는 ‘건물주’라 한다. 큰돈은 벌었으나 큰 병이 남았다. 병이 멈춰 세운 삶은 다들 마찬가지다. 

그러니 불행은 평등한가? 중국서 온 아주머니는 병원에 너무 늦게 와서 잘못하면 다리를 잃을 뻔했는데도, 기어코 조기 퇴원을 한다. “사정이 있어서”라고 부끄럽게 말하는 이에게 무슨 사정인지는 묻지 않았다.

이 병실은 사회의 축소판 같다. 담당 주치의는 모두 남자인데, 간호사는 모두 여자다. 의사는 아무개 선생님인데, 간호사는 누구라도 그냥 간호사님이고, 간병인, 청소노동자, 조리노동자는 그림자처럼 이름 없이 일한다. 환자들은 갈수록 의사보다 간호사, 간병인에게 몸과 마음을 더 의지한다. 

다 큰 어른 몸을 일으켜 앉히고, 세우고, 씻기고, 밥을 먹이는 일은 쉽지 않은 중노동이다. 사이사이에 청소노동자가 바닥을 닦고 나가는데, 눈 한 번 마주칠 틈도 없이 먼지처럼 사라진다. 그에겐 하루에 몇 개의 병실이 주어질까? 굽은 허리 사이로 보이는 파스는 그가 진 노동의 무게를 말해준다. 사회에서 매기는 노동의 가치는 그 무게와 반대다. 말의 가치도 그렇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신년 특집 토론회가 열렸다. 서울에 사는, 부유한, 고학력, 전문직, 나이 많은, 이름 있는 남자들이 둘러앉아 나랏일을 말하는데 꼭 남의 나라 말 같다. 

과연 우리의 삶을 제대로 알기나 할까. 기자협회 보도를 보니, 기자들이 취재할 때 의견이나 정보를 듣는 사람들도 저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인구 구성에서는 1%가 조금 넘는 교수, 의사, 변호사, 대표, 임원 등 전문가와 관리자가 의견 그룹에서는 70% 가까이 차지한다. 그런 지면에, 원고지 아홉 장의 몫이 주어졌다. 여기에 뭘 써야 할까. 중국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뉴스가 들려오는데 그 속에 없는 사람들의 말이 생각났다.

환자들의 불안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법에 대해선 의사보다 잘 알던 그들. 병원 구석구석의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 역시 자기 자리에선 전문가다. 사스 때도, 메르스 때도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른 병원 노동자들이, 같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서로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 직장 평의회가 있다면 지금 같은 위기도 훨씬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일터와 삶터의 민주정치는 사회도 그만큼 더 안전하게 만든다. 

위기의 시대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도 요청한다. 자연의 다른 존재와 인간이 공동으로 구성하는 정치공동체와 그런 생명의 정치가 가능할까. 먼지의 말과 강물의 말에 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위기 속에서 먼지 같은 존재들이 주체로 귀환하는 것을 본다. 원래 민주주의는 그런 존재들이 만들어간 정치이기도 하다.

<채효정 |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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