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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한·미가 동의하는 수준으로 비핵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북한에 원자력발전소를 제공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사안임은 삼척동자도 안다. 그럼에도 야당 대표는 원자로 제공을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이를 이적행위로 단죄했다. 정치 편작(扁鵲)의 명백한 오진이었다. 마찬가지로 정치는 정치로 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을 상대로 한 청와대의 법적 조치 운운은 하수(下手)였다. 이번 기회에 철저하게 야당의 기를 꺾어놓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일이 편할 수 없으리라는 정치적 계산이 한몫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정치력 부재를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됐다. 여야 간 지루한 정치적 공방을 지켜보면서 국가란 어떤 존재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국가의 최고 목표 중 하나는 부국강병을 통한 생존이며, 국가는 홀로 생존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국가관계에서 전쟁과 평화를 포괄하는 국가안보전략 수립은 생존의 필수적 요소로 인식되어왔다. 여기에다 무역 등 경제적 교류가 국가 생존의 또 다른 핵심요소가 됐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중앙에 공식적 권위체가 존재하지 않는 ‘무정부 상태’이기에 국가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서로에게서 어떻게 협력을 이끌어낼 것인가는 국제정치학의 고전적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느냐에 따라 현실주의자, 이상주의자, (신)자유주의자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국제관계를 국가들 간 힘(power)의 정치로 파악하는 현실주의자들은 국가를 주요 행위자로 가정하고, 합리적 존재로 인식한다. 이들에게 합리성은 국가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일체의 행위를 통칭한다. 한스 모겐소는 “합리적 외교정책은 위험부담을 극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겐소가 보기에 국제정치는 한마디로 ‘국력을 증대하기 위한 투쟁’이다. 마키아벨리는 한술 더 떠서 국가안보와 국가생존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조차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이상주의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서로 협조하려는 성향이 있기에 이러한 사람들의 집합체인 국가는 항상 평화를 추구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이상주의자들은 전쟁 원인도 인간본성이 아니라 완벽하지 못한 제도 탓으로 돌린다. 그러다보니 이상주의자들은 국제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어 집단안보체제의 중요성을 유독 강조한다. 실제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국제관계에서는 도덕과 이성, 국제법 내지 국제기구를 통한 전쟁방지와 평화유지가 힘보다 중시됐다.
신자유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는 로버트 코언, 조지프 나이 같은 학자들은 국가들 간 협력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부를 창출하기 위해 협력적 메커니즘을 추구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파한다. 이들은 패권국이 존재하는 위계적 국제질서 속에서 상호의존이 갈등을 야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상호협력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파악한다.
신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문재인 정부가 북한으로부터 비핵화 협력을 어떻게 이끌어내려고 했는지 전모(全貌)를 파악하기란 아직은 어렵다. 다만 탈원전을 외치다가 핵무력 증강에 진력하는 북에다 (비핵화를 전제로)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주려는 ‘착한 사마리안’ 코스프레만으로도 위선적이라는 비난은 받을 수 있겠다 싶다.
그럼에도 국가정책을 도덕적인 잣대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행위가 타당한 것인가라는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황에서도 금강산 유람길을 활짝 열었던 것처럼, 탈원전을 목이 터져라 외쳤어도 비핵화가 달성된다면 탈원전 항로를 180도 변경할 수도 있는 게 국가정책이 아닌가. 그래서 신내림을 받았다는 선무당 같은 공무원을 포함한 몇몇이 500개가 넘는 파일들을 왜 급하게 삭제하려 했는지 그 이유가 되레 궁금하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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