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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5일에 출판영업자들이 주최한 ‘한국출판유통 대토론회’에서 한 발표자는 출판사들의 ‘광고 의존도’가 높아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내놓지는 않았지만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의 매출이 올랐다는 것은 광고가 늘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회의실에 꽉 들어찬 사람들이 이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광고는 무엇일까요? 신문과 방송이나 잡지 등의 대중매체에 집행하는 광고가 아니라 대형서점의 판매대를 구입하는 비용과 대형 온라인서점에 책을 초기 화면에 노출하는 비용을 말합니다.
마케터들은 대형 오프라인서점에서 같은 책이 네 줄 이상 진열되어 있는 경우는 십중팔구 출판사가 판매대를 사서 책을 진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올리려면 서점의 판매대부터 구입해서 책을 진열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고 있습니다. 온라인서점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온라인서점의 초기 화면에 책을 노출하려면 공급률부터 낮춰줘야 하고, 광고도 하고, 사은품도 제작해 제공해야 합니다. 심지어 초기 화면에 노출한 책은 무조건 매출이 올라야 한다는 서점 담당자들의 요구에 사재기를 통해서라도 매출을 늘리는 출판사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하려면 비용이 만만찮아 이익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모처럼 기대되는 신간을 펴내 판매대라도 사서 진열하려면 자리가 없어 추첨까지 해야 할 정도랍니다. 이 바람에 의외의 신간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사전 기획된 책들만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바람에 출판시장은 물이 고여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는 저수지나 다름없습니다.
아, 예외가 있었습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을 수상하는 바람에 그의 소설들과 때마침 출간된 2010년대 가장 주목받는 작가인 정유정의 <종의 기원>(은행나무)이 베스트셀러 상단을 일제히 차지한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올해 상반기에는 모처럼 서점 매출이 작년보다 올랐다지요.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이런 의외성이 사라진 지 정말 오래됐습니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의 후광에 힘입어 잠시 반짝하는 소설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이 본원적 상품이 아니라 다른 문화상품에 영향을 받는 파생상품으로 전락했다는 자조만이 넘쳐났지만요.
이렇게 된 근원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50년 역사를 가진 민음사의 대표 상품 중 하나는 ‘민음세계문학’ 시리즈입니다. ‘민음세계문학’이 독주하던 시장에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 시공사의 ‘시공 문학의 숲’,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창비의 ‘창비세계문학’,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책세상의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열린책들의 ‘열린책들세계문학’ 등의 후발 주자들이 가세해 다양한 고전문학 작품을 개발하려는 경쟁체제가 구축돼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출판사가 번역판과 영문판을 묶은 세계문학 시리즈를 내놓고 영어학습용 실용서라 우기며 50% 할인해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실용서는 무한 할인이 허용됐습니다. 개인이 아닌 단체가 역자로 등장한 이 시리즈는 번역의 질도 의심받았습니다. 그러나 대형서점에 집중 진열되어 있는 이 시리즈를 독자들은 오로지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선호했습니다. 아, 윤문을 해서 쉽게 읽히는 장점도 있었다지요. 덕분에 이 시리즈를 펴낸 출판사는 사옥을 마련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이 출판사의 ‘성공’에 고무된 출판업자들이 이런 일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작년 이맘때쯤에는 한 신생 출판사가 문학동네와 민음사의 판본을 절충해 짜깁기한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묶은 세트 도서가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바람에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해당 출판사들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문제의 세트 도서는 번역 표절이 인정되어 서점에서 사라졌지만 씁쓸한 뒷맛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문학시장에서 공정경쟁이 사라지는 바람에 세계문학시장마저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수익구조가 악화된 문학 출판사들은 장기투자가 필요한 한국문학을 기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소설을 한 달에 한 권씩이라도 꾸준히 펴내는 출판사는 한 손으로 꼽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소설만 써서 먹고사는 작가 역시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자조가 넘쳐났습니다.
물류유통이 생산을 규정하는 법입니다. 유통 시스템이 잘못 작동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악순환의 구조가 지속되어 전반적인 질적 하락을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 출판시장은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는 문학시장에서만 국한해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림책의 질은 세계가 인정하는 수준에 올라섰지만 국내시장에서 1만부가 보장되는 작가는 한 손가락조차 꼽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어린이문학 도서를 읽고 좋은 책을 골라서 서평을 해주는 일을 하는 이들은 전반적으로 수준이 떨어져 추천할 책이 별로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문학이 흥해야 출판시장도 활성화됩니다. 문학적 상상력이 넘치는 나라여야 문화융성과 창조경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 몸의 비타민과 같은 것입니다. 소량이나마 갖추고 있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 법입니다. 그러니 좋은 소설들이 제대로 유통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게 과도한 할인경쟁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책의 질보다 마케팅 비용을 받은 책만을 노출해주는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 운영자와 이들에 놀아나는 출판인들부터 각성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들이 제발 가격경쟁이 아니라 가치경쟁을 벌여주기를 간곡히 빕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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