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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천 위에 흰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떨어졌다. 80대 부모들부터 60대 형까지 흰 천 위에 앉은 그들은 영정을 품에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고, 머리도 백발인 그들이 삭발식을 하는 뒤로 “민주유공자법 제정하라!”는 천 팻말을 들고 사람들이 섰다.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이 흰 천 위에 앉았고, 그 뒤로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대표들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성공회대성당, 6월항쟁이 시작된 그 자리에서 35주년 기념식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면서 늙은 유가족의 눈에서 소리 없이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이 유가족들의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1995년 아들 장현구를 잃은 아버지, 1994년 딸 권희정을 잃은 어머니, 1990년 아들 김윤기를 잃은 어머니, 1990년 아들 김학수를 잃은 아버지, 1987년 동생 박종철의 잃은 형, 1984년 남편 박종만을 잃은 부인 등이었다. 남편과 동생과 아들과 딸을 잃은 유가족들이 삭발까지 하면서 요구하는 게 민주유공자법(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의 제정이다. 저 유가족들은 자식을 앞세운 뒤에 일상의 삶을 살 수 없었다. 자식들이 못다 이룬 민주주의를 위한 길에 유가족들도 뛰어들었다. 투쟁의 현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경찰에 덜미를 잡혀 끌려가기도 하고, 한때는 시위 때마다 경찰버스에 태워져 머나먼 망우리나 미사리 어둠 속에 던져지기도 했다. 자식 같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경찰들에게 끌려가지 못하도록 악다구니를 하면서 싸우기도 했고, 세상의 아픈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연대하며 힘을 보태주기도 하면서 살아온 30~40년의 삶이 흘렀다. 그러다가 같이 유가협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갔다.

20여년 잠자고 있는 민주유공자법

아마도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 어머님이 살아계셨다면 유가족들의 삭발 현장에 먼저 앉아 계셨을 것이다. 지난 1월에 돌아가신 배은심 어머님의 마지막 소원이 민주유공자법 제정이었다. 이한열만이 아니라 박종철, 전태일 열사와 같은 이 나라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들도 지금은 민주화운동 관련자일 뿐이다. 민주유공자로서의 예우는 전혀 받지 못한다. 지금 국가의 보훈 대상인 유공자에는 독립운동을 한 분들과 호국 공무원들, 그리고 4·19와 5·18 관련한 분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치열했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은 여전히 유공자의 범위 안에 들어 있지 못하다.

1999년 말에 국회를 통과하고, 2001년 1월에 제정·공포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1960년대부터 1990년대 권위주의 시절의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9700여명이다. 이 중에는 사망자 136명과 부상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된 이들 중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같은 사망자와 민주화운동 과정 중에 부상을 입었다는 700여명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자는 게 유가족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이 법을 제정하도록 20년 넘게 국회 문을 두드렸지만, 매번 좌절을 겪었다.

처음에는 대상자가 너무 많아서 국가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망자와 부상자로 대상을 축소해서라도 입법하자고 했지만, 결국 이번 국회에서도 법안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채 법안이 계류 중이다. 국민의힘은 민주화운동 세력들에 대한 과도한 예우라고 반대하고, 더불어민주당은 결국 자기 세력들을 예우하기 위한 ‘셀프 입법’이라는 공격에 주춤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성공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겨우 800여명의 민주화운동 유공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자는 것인데도 이런 군색한 핑계 앞에 국회는 늘 주춤거리기만 했고, 그러는 사이 유가족들은 하나둘 저세상으로 떠났다.

천막농성 9개월…국회가 답하라

유가족들이 삭발한 채 앉아 있던 6월항쟁 35주년 기념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는 “민주화에 공헌하고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이를 기념하고 예우해 ‘독립’ ‘호국’ ‘민주’ 가치가 민주공화국을 탄생시킨 정신임을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총리의 약속이 국회에서 입법으로 결과지어지기를, 그래서 유가족들의 한이 덜어지기를 기대해도 되는 것일까?

염천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도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유가족들 시위가 이어진다. 천막 농성도 9개월이 지났다. 이젠 국회가 응답해야 할 때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4·16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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