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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게 잘 먹는 것도 아니고

운동부족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날들을 배고픔에 시달렸고

어린 나이에 각종 일로 온몸 성한 곳이 없는데

이상하다 물만 먹어도 살이 오른다

 

밥 앞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비굴하게 밥을 번 적은 없다

북한 어린이 돕기 성금보다 술값을 더 지출한 게 사실이지만

큰맘 먹고 하는 외식도

고작해야 자장면이고 특별히 탕수육을 곁들인 날은

밤새 설사로 고생했다

 

굶은 기억이 살찌게 하나

슬픔이 배부르게 하나

그 기억을 잊기 위해 얼마나 허겁지겁 살아냈는지

잊는다는 것이 병을 주었나

 

참는 것이 밥이었고

견디는 일이 국이었고

울며 걷던 길은 반찬으로 보였는데

배 나온 사람들을 보면

부황과 간경화로 먼저 간 식구들이 떠오른다

저, 좁은 땅 다 파먹고 말없이 누워있는

슬픈 무덤 덩어리들

 - 유용주(1960~)

 

밥뿐만 아니라 슬픔도 허기도 가난도 많이 먹으면 배가 나오는구나. 상처도 괴로움도 마음에 자꾸 쌓이면, 밥을 적게 먹어도, 밥 대신 물만 먹어도, 저절로 부어서 불편한 살이 되는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일들을 밥 먹듯이 참고 견디며 안으로 삭였는데도, 먹고 놀기만 해서 살찌고 배가 나왔다는 오해를 견뎌야 하는구나. 살도 배도 입이 없어 말은 못해도 할 말은 참 많을 것이다. 그 말을 생전에 다 하지 못하고 영영 떠난 이들의 무덤은 생전에 나왔던 배처럼 둥글게 부풀어 있구나.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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