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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주 | 영화감독 redcallas@gmail.com

 

며칠 전의 밤. 서울 아현동 쪽으로 유인물을 돌리러 나간 동료들이 동네 아주머니의 간첩신고로 잡혔다. TV 뉴스에서는 호탕하고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그가 당당하게 연설하는 모습이 계속 보도되고 있었으며 여전히 낮의 학내 집회에 모인 학생의 수는 200명을 넘지 못했다. 그러니까 1987년 6월9일. 10일의 디데이를 하루 앞둔 그날 밤, 세미나룸에 모인 우리의 상태는 그랬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이야기하며 국민대회에 모여 달라는 유인물은 동네 아주머니의 간첩신고로 인해 제대로 뿌려지지도 못한 채 경찰서로 실려 갔고, 그 즈음 대부분의 학내 집회가 그러하듯 매번 보던 얼굴들이었다. 명동 근처라도 갈 수 있을까? 굳이 학내에서 집회를 하고 가야 하나? 너, 집에서 방 정리는 하고 왔니? 뭐 그런 주절거림과 막걸리와 은하수 담배연기가 우리의 심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린 패배감에 익숙했고 그 어린 스물 몇의 나이에 자조적인 표현 수십개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리고 6월10일. 학교의 정문 앞에는 5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였고, 우리는 삼삼오오 명동으로 향했다. 최루탄에 범벅이 되어 비틀거리면 미도파백화점 뒤에 있던 일식집의 종업원이 나를 끌고 식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러 장의 차가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준 주방장은 매운탕을 끓이며 먹고 가라고 했다. 자정이 넘어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던 나를 태워 공짜로 집으로 데려다 준 건 콜택시 기사님이었다. 하루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다음날, 학교로 가는 길. 지하철역 앞에서 처음 보는 한 학생이 내게 물었다. “저기, 데모할 때 부르는 노래를 배우고 싶은데 노래책 같은 것도 서점에서 파나요?” 그렇게 나의 그리고 우리의 6월이 시작되었다.

필리핀의 독립영화 감독인 닉 데오캄포의 다큐멘터리 <혁명은 유행가 가사의 마지막 후렴구처럼 다가온다>는 필리핀의 민주화 운동에 관한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닉 데오캄포의 영화 제목 짓는 센스를 좋아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의 첫 다큐멘터리인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의 필리핀 여성 민주화 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전시에 사는 것이다>의 영향으로 만든 제목이다. 6월항쟁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종로 거리를 걸으면 하염없이 듣게 되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유행가의 마지막 후렴구처럼. 어느 누구도 예견하지 못하는 거대한 파도처럼 우리 곁에 변화의 그 순간이 다가온다. 희생이 있었다.

 

출처:경향DB


사람들은 냉정하게 그 희생을 외면하는 것으로 보인다. 희생은 서럽지만 덧없어 보이고, 먼저 마음 아파 견딜 수 없는 몇몇이 그 희생 근처를 배회하며 호소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냉정하다. 혹은 들리지 않는 듯, 다른 언어를 쓰는 듯 행동한다. 호소하던 몇몇은 이제 투덜거리기도 하고 환멸감에 더 먼 곳으로 자신을 떠나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차가운 것만이 생생해지는 시간이 흐르고 흐르던 어느 순간, 세상은 미친 것처럼 갑자기 뜨거워진다. 사실은 냉정한 게 아니라 겁이 난 것이었다고,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욱 열심히 듣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미리 포기하거나 불가능하다고 믿거나 환멸감에 버리지만 않으면.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날까지만 버티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6월이 왔고, 그렇게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래서 제안 드리는 그날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 6월16일에 있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 복직을 위한 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 행진 걷자!’에 함께하자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 1시 언론노조의 희망캠핑장이 있는 서울 여의도 공원에서 출발해 대한문 분향소 앞까지 즐겁게, 그날을 혹여라도 재촉해보는 행진이다. 그리고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희망버스 사법탄압 불복종, 돌려차기’ 행사가 있다. 검찰은 지난해의 희망버스 승객 130여명에게 폭탄같은 벌금을 날렸다. 그리고 이에 저항해 모두가 법정 투쟁에 나서고 있다. 법률 비용만 근 3억원이 있어야 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법정 투쟁에 나선 희망버스 기소자들을 응원하고, 함께 지키며 부당한 탄압에 맞서는 자리다. 함께 난장을 즐기며 서로의 심장을 위로해주는 자리다. 그날 만나자. 그러면 어느 날 온다. 유행가의 후렴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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