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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2019년 4월24일,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법에 대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두고, 당시 자유한국당 임이자 의원과 문희상 국회의장 간의 몸싸움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임 의원은 문 의장을 가로막으며 “의장님 (제게) 손대면 성희롱이에요”라고 했고, 졸지에 성 범죄자로 몰린 문 의장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렇게 하면 성추행이냐”라며 임 의원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임 의원은 “성추행”이라고 주장했고, 문 의장은 “자해 공갈”이라고 맞섰다. 이후 두 사람 모두 피해자를 자처하며 입원했다.

이날 이채익 의원이 같은 당 임 의원을 두둔한답시고 한 발언은 이 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문해력을 대변한다. 이 의원은 국회의장실을 점거한 채 열린 당 긴급의원총회에서 열변을 토했다. “키 작은 사람은 나름대로 트라우마와 열등감이 있다.” “정말 결혼도 포기하면서 여기까지 온 올드미스.” “… 못난 임이자 의원 같은 사람에게는 조롱·수치심을 극대화하고 성추행해도 되느냐.” 내가 여성 의원이라면 이 발언이 더 폭력으로 느껴졌을 것 같다. 가해자는 문 의장인가? 이 의원인가?

남성과 남성의 싸움은 ‘결투’, 여성들 간의 싸움은 ‘머리끄덩이 잡기’로 불린다. 어쨌든 몸싸움 중 신체 접촉은 불가피하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 접촉은 곧바로 성추행이 되는가? 여야를 막론하고 여성 의원을 앞세운 몸싸움과 성추행 주장, ‘피해 여성 의원’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 여성 정치 참여의 일면이다. 이러한 사태를 예견해서였을까. 남장 의원으로 유명했던 김옥선 전 의원이 생각난다.

30년 전, 1991년부터 시작된 성폭력 추방운동과 법 제정 이후에도 한국 남성의 성문화에는 변화가 없다. 디지털성폭력의 등장과 파급을 고려하면 악화됐다. 여성의 의식 고양에 비해 남성은 성문제에 관한 한 ‘문화 지체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의당 사건’의 처리 과정은 변화의 모델이 될 만하다. 장혜영 의원 ‘개인의 역량으로 가능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기존의 성희롱 범죄와 달리 두 가지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피해 여성 지위, 가해 남성이 정해
성폭력 범죄, 심각성·죄질로 판단
가해자 따라 경중 정해져선 안 돼
유명 인사 범죄 지나치게 부각 땐
젠더 아닌 남성 간의 정쟁 변질

첫째, 장 의원은 “피해자다움도 없지만 가해자다움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성범죄 가해자는 보통 사람들이다. 이들은 남성이라는 성별 외에 인구학적 특징이 없다. 직업·계급·나이·정치 성향·교육 정도 등은 범죄 발생과 무관하다.

법정에서는 작용한다. 가해자의 자원, 유전무죄의 원리가 여기서도 통한다. 가해자다움은 없지만 돈 있는 가해자는 법을 비켜간다. ‘n번방’ 사건의 조주빈은 1심에서 징역 45년형이 선고됐지만, 세계 최대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6개월 영아도 있었다)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의 운영자 손정우는 1년6개월형을 받고 만기 출소했다. 손씨는 한국에서의 영장, 중형이 예상되는 미국으로의 송환 모두 피했다. 손씨에게 자유를 허락한 이는 서울중앙지법 원정숙 영장전담 부장판사다(이런 분의 이름은 기억해야 한다).

조씨의 형량에는 “범죄단체 조직”이 크게 작용했다지만, 근본적으로는 손씨 측 변호사의 ‘실력’과 그에 따른 수임료가 두 사람의 인생을 갈랐다. 게다가 손씨는 검사의 실수까지 얻었다. 이들 사례는 성범죄 전문 변호사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이후에도 지속될 문제거리다. 가해자다움은 존재하지 않지만, 성범죄가 변호사의 능력에 의해 좌우되기 시작하면 성폭력은 젠더 모순이 아니라 계급 문제로 인식될 것이다.

위 사례는 장혜영 의원이 가해자를 형사 고발하지 않은 대처와 연결된다. 정의당 사건 처리의 두 번째 의미다. 앞서 말한 대로 성범죄는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로 발생하는 일상적 폭력이다. 그러나 남성 담론은 피해자는 논외로 한 채 남성들이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한다. 정치권에서 성범죄는 정쟁의 단골 메뉴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의 “정의당은 친고죄 폐지에 찬성해 놓고, 자기 당 대표의 성추행 의혹은 형사 고발하지 말라고 한다”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친고죄(親告罪)는 늘 논쟁적이다. 친고죄는 범죄 피해자나 그 밖의 법률에서 정한 사람이 고소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범죄를 말한다. ‘그 밖의 법률에서 정한 사람’은 교사나 의료진, 지역 사회 등 피해자를 대리해 신고할 수 있는 이들이다. 이외 ‘제3자’는 신고할 수 없다.

친고죄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이중 전략이다. 친고죄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지만 성폭력 발생과 해석, 처리 과정은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친고죄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 남성 중심적 성문화에서 신고로 인해 이중의 고통을 겪을 수 있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임시적 장치다. 장 의원이 가해자를 고소하지 않은 것은 이번 사건을 정치권 남성들이 정쟁화하지 말라는 경고다.

성범죄는 일탈이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문화다. 보수 세력, 녹색당, 노조, 시민사회는 물론 회사, 학교, 교회, 병원, 공중화장실까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없는 곳은 없다. 나는 정치인이나 유명 인사의 성폭력이 매체를 뒤덮고 공방전이 일어나는 상황이 여성에게 유리할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성희롱이나 성폭력 상담을 하다보면, 의외로 쉽게 ‘올바른 방식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알고 보면 가해자가 남성 조직 내 약자이거나 상사의 미움을 받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사건의 성격이 남성들의 이해관계와 계산(‘정세 분석’)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성폭력은 ‘그냥’ 범죄다. 다른 범죄처럼, 범죄의 심각성과 상황, 죄질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그런데 유독 이 범죄는 남성 가해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사건의 경중이 달라진다. 자원이 많은 가해자, 남성 사회에서의 지위와 그들끼리의 관계에 따라 ‘피해자 유발론’으로 흐르거나,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건은 묻힌다. 피해자 유발론, 비가시화 모두 성범죄의 원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문제는 사건 자체, 피해 여성의 상황조차 가해 남성의 지위에 의해 정해지는 게 현실이다. 성폭력 사건의 의미가 여성의 인권이나 공중보건 문제가 아니라 남성 문화의 이해(利害)관계에 의해 취사, 선택된다. 피해 여성은 남성의 의도에 따라 ‘꽃뱀’에서 ‘순수한 피해자’로 분류된다. 이것이 피해자다움의 정치학이다. 피해자를 임의로 규정하고 남성들끼리 도덕적·정치적 공격을 주고받는다. 유명 인사의 성범죄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불편한 이유다.

이는 가정폭력(아내에 대한 폭력)에는 미투가 없는 현실과 연결된다. ‘여성 검사’가 TV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 남편의 폭력을 고발하는 경우는 없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 정치가 거래, 활용할 수 있는 자산으로 간주된다. 매체는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피해와 가정폭력은 다루지 않는다. 아내 폭력은 장기간에 걸친 테러와 고문에 가까운 피해임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이용할 만한 정쟁거리가 되기 어렵다. 아내 폭력은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집에서 일어나는 남성 문화의 ‘합의’ 사항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아내를 구타한 정치 지도자가 사임한 경우를 알지 못한다.

4월7일 서울·부산을 비롯해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있다. 나는 전직 광역자치단체장들의 성범죄 사건이 선거용으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성범죄 근절은 당선된 이후에 조용히 애써주기 바란다. 성범죄에 대한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질이 높아지길 기대한다.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라는 번역어부터 바꿔야 하고, 일반 남성에 의한 ‘더 심각한’ 피해자들을 고려해야 한다. 후보자들은 자신의 성범죄나 여성 비하 경력을 고백하는 내용이 아니라면 선거 기간 동안 ‘전직 가해자’들을 언급하지 않았으면 한다.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다른 당 가해자 비난에 집중하는 행위는, “나는 아니다”를 증명하면서 ‘피해자’를 동원하는 것에 불과하다.

공부가 가장 중요하다. 공부하는 후보가 준비된 후보다. 젠더 관련 ‘실언’은 약자를 짓밟고 싶은 인격적 결함이 아니라면, 대개 무지에서 나온다. 젠더 정치는 문명의 모형(母型)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공부가 필수적이다. ‘큰 정치(젠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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