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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詩想과 세상

비와 눈발

opinionX 2020. 11. 30. 10:07

빗소리보다 한 옥타브 낮고 눈발보다 고음

물음표보다 공손하고 느낌표보다 솔직한

아토피처럼 습관적인 비와 눈발 사이 오래된 습속

수면제 녹는 소리

눈꺼풀이 닫히며 헤어진 애인의 발자국 소리

슬픔 툭툭 털어 우산을 접고

비와 눈발 사이를 떠도는

터무니없이 당신을 용서하고픈 화해의 감정

투명한 물방울로 다녀간 그 사이

기명숙(1967~)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 탁자 위에 놓인 컵도 물도 투명하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알약 하나가 물컵 속으로 떨어진다. 느린 화면처럼 서서히 풀어지며 아래로 가라앉는 하얀 알약. “수면제 녹는 소리”에 시각은 청각으로 바뀐다. 가만히 귀 기울이자 눈 녹는 소리보다 높고, 비 내리는 소리보다 낮다. 수면제는 애인과의 이별 후 습관적으로 먹는 “오래된 습속”이다. 왜 먹느냐고 묻는다면 굳이 감출 이유가 없다.

수면제의 효과가 금방 나타난다. 환각인 듯, 흐릿한 의식 너머로 “헤어진 애인”이 보인다. 빗줄기보다 낮고 눈발보다 높은 소리로 찾아온 당신은 잠든 나를 내려다본다.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이다. 나 혼자 남겨두고 떠난 당신에 대한 원망이 스르르 녹는다. 마음이 평안해지자 “화해의 감정”이 스며든다. “비와 눈발 사이를 떠”돌다 “투명한 물방울로” 찾아온 당신을 이제 용서하기로 한다. 이별의 슬픔이나 원망을 초월한 지독한 그리움이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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